월간참여사회 2002년 10월 2002-10-24   301

철면피들의 굿판은 이제 그만!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의 사회귀족


소위 지도자란 사람들의 꼴불견으로 나라가 온통 난리다.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는 임기 말의 DJ 정권을 벼랑끝으로 몰아 넣었다. 유력한 대선 후보는 부친의 친일 의혹과 아들들의 병역비리 및 은폐 의혹으로 만신창이다.

누가 봐도 권문세가에 최고의 학벌에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쳐온 대통령 후보지만, 그 뒤에 가려진 갖가지 불미스런 의혹들이 국민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다. 지난 8월에는 국무총리 서리가 둘씩이나 연거푸 국회 청문회를 넘지 못하고 낙마했다. 대학총장과 신문사 사장 출신으로 우리 사회의 내로라 하는 엘리트들이었는데, 갖가지 불·탈법 사실과 도덕불감증이 확인되면서 결국 불명예 퇴진했다.

총리서리 둘을 낙마시킨 국회의원들이 도덕적으로 떳떳한가 하면,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누구보다 먼저 지탄받고 반성해야 할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청문회장에서 서슬 퍼렇게 추궁해 대던 국회의원들의 얼굴은 누가 봐도 철판이었다. 국민은 혼란과 냉소와 역겨움에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

탐욕과 사치의 화신

정치권의 지도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업 경영으로 세계적인 부를 모은 거대 재벌들 가운데서도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이를 찾기가 힘들다. 뇌물 수수와 정경유착, 이중 장부와 분식회계, 불법적인 상속과 증여, 탈세와 노동탄압 등의 불명예가 한국 재벌의 별명처럼 따라다닐 정도다. 부동산 투기, 벤처열풍, 주가조작 등으로 일확천금을 손에 쥔 졸부들은 더더욱 가관이다. 서구의 자본주의를 지탱시켜 준 금욕과 절제, 청부(淸富) 사상과 같은 청교도 윤리는 애당초 찾아보기 힘들다. 탐욕과 사치의 화신처럼 보인다. 보통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짓기 위한 과시소비에는 펑펑 돈을 뿌리면서도, 재산의 작은 부스러기라도 떼어 사회봉사단체에 기부하는 일에는 너무 인색하다.

하지만 더욱 걱정인 것은 지적 권위와 도덕적 리더십의 대명사여야 할 대학총장과 언론인들까지 갖가지 불미스런 사건들로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립대학 이사장이 비리와 탈법을 일삼아 교육현장을 황폐화시킨 일은 숱하게 보아왔지만, 몇몇 대학의 경우는 지성의 상징인 총장들까지 학교 예산의 부도덕한 집행, 독선과 전횡, 가짜 박사학위 구입 알선 등으로 물의를 빚었다. 한국 언론을 대표하는 유력 언론사의 사주들도 친일 경력과 탈세, 도박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거나 구속까지 되는 실정이다. 그러면서도 반성은 없다. ‘억울하게 걸렸다’, ‘정치적 탄압이다’라는 뻔뻔한 주장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할 뿐이다.

최근 들어 특히 걱정되는 대목은 부도덕하고 타락한 상류층 인사들이 떳떳치 못한 방법으로 손에 쥔 권력과 돈을 무기로, 특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세습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만의 사교클럽에서 교분을 나누고 해외 원정골프를 즐긴다. 명품 백화점의 귀족 고객으로 대우받으면서, 인터넷의 귀족 사이트에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각종 정보를 공유한다. 원정출산으로 아이를 낳고, 자녀들을 조기 유학시키며, 엄청난 액수의 사교육비를 들여 명문대학 졸업장을 물려준다. 조선조 때의 선비정신도, 선진 외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도 지금 이 땅의 지도자와 상류층 인사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

민족반역자를 단죄하지 못한 죄

서민의 심정은 한마디로 참담하다. IMF 직후보다 경기가 나아졌다 하더라도 서민이 경험하는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상류층 전반에 대한 서민의 불신과 절망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서민 눈에 비친 그들은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잇속 챙기며 살아온 사람들일 뿐이다. 나라가 위급에 처하게 되면 제일 먼저 민족을 배반하며 자기 살길을 찾아 나설 몹쓸 사람들일 뿐이다. 탐욕으로 똘똘 뭉쳐 오로지 출세를 쫓는 사람들일 뿐인 것이다. 그들은 지도자가 아니라 이 사회의 ‘타락한 귀족’일 뿐이다. 개명된 민주사회에서 ‘귀족’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조소의 대상이다. 그들에 대한 비아냥일 뿐 아니라, 그런 이들이 군림하는 허울뿐인 민주사회에 대한 좌절과 분노의 표현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해방 직후에 민족반역자를 단죄하지 못한 오욕의 근대사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단죄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지도자’로 등장하는 것을 허용했을 정도다.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조국의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았던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정치, 경제, 법조, 검찰, 경찰, 군, 문화, 언론, 교육계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지도층 인사’로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난 것이다.

그들에게 건강한 사회윤리와 국가관이 제대로 서 있을 리 만무한 일이다. 국민의 존경을 받지 못한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죄는 더 큰 죄를 낳는 법이다. 그들은 폭력과 더러운 돈을 동원했다. 폭력과 돈에 의지하지 않고는 정통성 없는 부도덕한 지배질서를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에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반공정책과 성장제일주의도 지도자 상을 왜곡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권력자와 재벌들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국시(國是)인 반공만 외치면 만사가 오케이였다. 수단적 가치일 뿐인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최고의 가치로 추구된 것도 가치의 전도를 일상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반공과 경제성장의 명분 뒤에서는 끔찍한 국가폭력과 반인륜범죄가 저질러지기도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비민주적 생활양식도 온 사회에 퍼져나갔다.

한편, 함량미달의 선출직 지도자와 관련해서는 잘못된 정치제도 외에도 유권자의 비이성적인 투표 행태에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책과 비전, 능력과 도덕성을 비교해 뽑기보다는, 동향 사람, 집안 사람, 동문 출신을 찾아 뽑기 일쑤이니, 자격 없는 사람들이 뽑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지역감정과 연고주의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유권자들은 부도덕한 선출직 지도자를 비난할 권리보다는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책임이 더 큰 것이다.

민주주의가 부재했던 최근까지의 암울했던 역사도 지도자와 상류층의 부도덕을 부채질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권력자나 지도자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거나 그래서 소위 ‘성역’이 엄존했던 시대에, 지도자들은 민중적 검증과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정치권이든 경영계든 심지어 언론계, 학계,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높은 사람들은 견제받고 비판받지 않은 채 보통 사람들 위에 군림만 해왔던 것이다. 오직 절대권력자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출세가 보장되는 시대였다. 충성심 하나로 출세가도를 달려온 지도층 인사들이 하나둘씩 낙마하고 있는 것도 실은 민주화와 개방화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민주사회는 ‘성역’과 ‘군림’의 낡은 관행과 공존할 수 없다. 민주주의란 특권의 해체요, 성역 허물기이다. 당연히 지도자와 상류층 인사들은 어렵게 시작된 민주적 검증과 비판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면서 자질을 키우고 국민적 동의를 얻어 가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더욱 공고한 자신들만의 특권세계를 구축하려고 애쓰고 있다. 역사를 거스르는 범죄이다. 그 결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의 부도덕한 특권의식’과 ‘타락한 귀족문화’와 ‘계급간 균열’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느냐, 산업화된 귀족사회로 가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선택은 물론 국민 손에 달려 있다. 민주국가의 주인으로 살 것인가, 귀족사회의 머슴으로 살 것인가, 국민의 현명한 선택이 요구되는 역사적 분기점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홍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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