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5월 1999-05-01   783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교육』

미국 흑백차별 타파한 ‘자리지키고 앉기 운동’

민권향상을 위한 학생운동은 흑인을 차별하는 식당에서 무리를 지어 연좌시위(Sitins)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북부와 남부 여러 도시의 흑인 활동가들은 1943년에 이미 연좌시위를 시작했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1960년 2월 1일 노스캐롤라이나 A&T 출신의 열일곱살짜리 학생 네 명은 Green-sboro대학의 간이 식당에 앉아서 식당종업원이 백인 고객들만 상대하는 것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서비스가 거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날마다 식당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흑인, 백인 구별 없이 많은 학생들이 여기 가세했다. 침묵으로 항의하는 학생들로 좌석이 꽉 차버려 식당은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1960년 가을, 이 식당은 결국 굴복하고 흑인 고객들을 접대하기 시작했다.

이 ‘죽치고 앉아 있기’운동은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2주만에 이 운동은 남부 5개 주 15개 도시로 번져나갔다. 다음 12개월 동안에 100개 도시의 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여기에 참가했고 3,600명이 감옥에 갔다. 학생들은 Sit-ins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흑인의 출입을 거부하는 교회에서 무릎꿇고 있기(Kneel-ins), 여관의 로비에서 자고 있기(Sleep-ins), 수영장에서 수영하며 항의하기(Swim-ins), 흑인의 출입이 제한된 해변에서 멱감고 있기(Wade-ins), 공공도서관에서 책 읽고 있기(Read-ins), 공원에서 놀고 있기(Play-ins), 심지어는 영화관에서 영화보고 있기(Watch-ins)까지 하며 흑인들의 접근이 금지된 곳 어디나 항의시위를 벌였다.

제임스 로손이 이끈 내쉬빌의 학생들은 1959년 가을에 연좌데모를 감행하였다. 로손은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를 거부하고 감옥행을 택한 사람으로 그 후 3년 동안 인도에서 선교사로 지내는 동안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대한 이론을 공부했다. 로손이 개최한 비폭력에 대한 워크숍에서 그들은 ‘학대를 당하더라도 뒤에서 공격하거나 저주하지 말라’, ‘항상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보이게끔 하라’, ‘사랑과 비폭력을 기억하라’ 등의 ‘비폭력을 위한 행동수칙’을 채택하고 있었다.

다이안 내쉬 나중에 워싱턴 시장이 된는 학생들을 이끌고 내쉬빌 학생운동을 조직했다. 경찰은 연좌시위에 가담한 82명의 학생을 체포했다. 그들은 보석금 납부를 거부하고 감옥에서 한 달간 복역했다. 내쉬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가 만약 보석금을 낸다면 이것은 우리가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는 과정에서 행해졌던 불법과 비도덕적인 관행을 묵인하고 그것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감옥에서 형기를 채웠다. 1960년 5월, 내쉬빌의 간이식당들은 흑인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인종차별을 넘어 사회변혁으로!

애틀랜타에서는 학생들이 흑인을 차별하는 버스 정류장과 시청 구내 식당 등 공공시설과 개인 소유의 간이식당 등에서 연좌시위를 시작했다. 애틀랜타의 많은 흑인 구매자들은 리치백화점에 외상거래 계정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학생들은 그들에게 “인종차별적인 외상 장부를 덮고, 자유롭게 계산서를 여십시오” 라고 말하며 그들의 계좌를 닫으라고 호소했다. 학생들은 이와 함께 이미 민권의 대변인으로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에게 그들과 함께 리치백화점의 간이식당에 앉아 있자고 호소하였다. 킹의 참여로 학생들의 주장은 전국적인 주목을 끌었다. 1961년 가을, 애틀랜타의 간이식당들이 인종차별대우를 폐지했다.

SCLC의 지도자인 엘라 베이커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생운동의 에너지와 추진력을 보았고 그들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이러한 자발적 운동이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우려했다. 베이커는 1960년 봄 노스캐롤라이나주 Shaw대학에서 학생들을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의 목적은 비폭력 저항운동에서의 훈련과 활동에 있어서 학생들에게 좀 더 통일된 방향감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베이커의 개회 연설이었던 “햄버거보다 많은 것”은 학생들에게 간이식당에서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을 넘어 전체 사회구조를 바꾸는 생각을 하도록 촉구했다.

NAACP와 SCLC의 대표자들, 그리고 두 개의 다른 민권 단체인 Congress of Racial Equality(CORE)와 Fellowship of Reconciliation(FOR)이 그 회의에 참가했다. CORE와 FOR은 사회개혁을 달성하기 위해 비폭력 직접행동을 사용해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단체들은 학생운동가들이 그들 조직의 청년 지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기존의 민권단체에 비판적이었던 많은 학생들은 그 초청을 거절하고 대신에 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라는 독립적 기구를 만들었다. 모든 SNCC의 활동은 개인적 관계보다는 단체를 강조하면서 1960년대 대부분의 민권 저항운동에 참가했고, 민권운동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 됐다.

자유승차자와 유권자 등록운동

1946년, 모건과 버어지니아주의 대법원은 주와 주 사이를 운송하는 운송수단에서의 차별을 강요해온 주법은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1946년의 이런 판결에도 불구하고 연방정부가 그 법을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 주 경계를 통과하는 버스들의 인종차별은 지속됐다.

자유승차 시위는 1961년 5월 4일에 시작됐다. 버스들이 남부의 더 외진 곳까지 운행하면서 야만적인 권리침해가 더욱 빈번해졌다. 노스캐롤라이나, 버밍햄, 앨러버머, 몽고메리, 미시시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린치와 방화, 투옥을 무릅쓰고 계속 싸웠다.

그해 늦여름에는 1,000명 이상의 활동가들이 자유승차에 참가했고, 300명 이상이 체포됐으며 그들의 대부분이 주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갖은 고문과 노역을 감수했다. 감옥생활을 통해 어떤 사람은 파괴됐고 또 어떤 사람들은 보다 강해졌다. 결국 1961년 9월 22일에 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ICC)는 버스, 기차, 터미널에서 “인종, 신념이나 국가적 기원에 따른 차별 없이”좌석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선포했다.

1961년 당시 법적으로는 흑인의 투표를 보장하고 있었지만 정작 흑인들은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없었다. 1962년에 SNCC, CORE, SCLC와 NAACP는 경쟁을 막고 조직간의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Council of Federated Organ-izations(COFO)라 불리는 제휴체를 건설하고 1963년, ‘자유투표’라는 모의투표를 실시했다. 이는 남부에 살고 있는 흑인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약 8만 명의 흑인 시민들이 거부당해온 투표권에 항의하기 위해 자유투표에 참가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61년에서 1963년까지 투표권 등록에 성공한 흑인 유권자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버밍햄에서 공정한 고용과 차별철폐를 위한 노력들을 탄압한 폭력 등 잔인한 행위가 언론의 관심을 끌면서 흑인에게도 일자리를 줄 수밖에 없게 된 일, 시민권 입법청원을 지지하기 위해 73세의 노동활동가가 조직한 ‘워싱턴을 향한 행진’,‘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의 행진’ 등 흑인들의 민권투쟁은 계속되었다.

김미란 참여사회아카데미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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