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9월 2002-09-24   1018

815민족통일대회 3박4일 취재기

기자 양반들, 왜 다른점만 묻습네까?


8·15 민족통일대회가 열리는 첫날 동작구에 사는 서순정 씨(73세)는 새벽부터 워커힐호텔을 찾았다. 북측 대표단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손을 흔드는 북측 대표단이 호텔 안으로 다 들어가고서야 말문을 연다. “저 사람들이 바로 평양사또 아니겠소. 평화스럽게 왔으니 평화스럽게 갔으면 좋겠네. 일반 사람이 많이 와야 하는데 여긴 경찰이 더 많구먼. 나는 그냥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친구들이랑 일찍 와 봤습니다.”

가족끼리 워커힐을 찾은 시민들도 있다. 이인백 씨(40세·고덕동)는 광복절 오후 다섯 살 난 아들과 함께 행사장을 찾았다. 북측과 남측의 의견차이로 행사가 1시간 넘게 지연됐지만 역정 한번 내지 않는다.

“북한체제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지만 통일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통일에 대한 감각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자라나면서 북한문화를 밀접히 접하면 뭔가 다르게 크겠죠. 분단의 이유를 묻기 전에 북한과 남한은 원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민간중심 교류 본격화

지난해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이어 올해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개최됐던 ‘8·15 민족통일대회’가 막을 내렸다. 이번 통일대회는 민간이 중심 되는 남과 북의 본격적인 교류로 대회시작 이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

북측 대표단에는 북측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 회장인 김영대 단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여원구 의장 등 116명의 북측 주요인사들이 참가했으며 남측 또한 민화협, 7대 종단, 통일연대 등 민간통일운동을 위해 노력하는 430명의 인사들이 함께 했다.

이번 대회에는 30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몰렸으나 제한적으로 취재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이번 행사도 보안문제에 신경 쓰는 눈치였다. 더군다나 지난해에는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평양파문’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와 민화협은 더욱 조심하는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행사 규모가 축소되면서 취재규모도 함께 줄였기 때문이다.

민족통일대회 첫날부터 화제를 모은 사람은 단연 몽양 여운형 선생의 딸 여원구 의장이었다. 북측 대표단이 숙소에 도착하고 환영공연을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현장의 분위기는 매우 밝았다. 공항에서 취재기자들이 핸드폰으로 소식을 전하면 프레스룸에 있는 기자들은 부지런히 인터넷으로 기사를 송고했다. 사진을 전송하기 위해 디스켓을 들고 뛰어들어오던 사진기자 한 명은 “북측 예술단의 여성배우가 자신을 향해 윙크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시작이 순조롭다고 마음을 놓고 있던 기자실은 오후가 되면서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더. 여원구 의장 소식이다. “여원구 의장이 여운형 선생 묘소에 참배하러 가겠다고 했다”, “남측이 이를 말리고 있다”, “북측은 참배를 허가하지 않으면 다시 북으로 되돌아가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등 다양한 소문이 돌았고 기자들은 이를 확인하려고 남측 민화협 대변인을 찾느라 부산을 떨었다. 민화협 측은 “공식적으로 확인해 드릴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자신들도 북측이 늦게 내려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내부토론이 있는 모양이다”고 말했다.

그러다 오후 5시에 열리기로 한 행사가 지연되었다. 기자들 사이에는 행사가 취소될지 모른다는 기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환영공연이 열리기로 한 가야금홀에는 결국 6시 30분에야 남측 대표단부터 입장하기 시작했다. 저녁 7시부터 가야금홀에서 다른 공연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이 남측 대표단의 판단. 6시 50분경 북측 대표단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화제가 뒤늦게 시작한 환영공연으로 넘어가던 찰나 또 다른 소식에 기자실은 한판 술렁거렸다. 남측의 환영공연이 열리기 시작했던 오후 6시 30분 여씨가 북측 인사 9명, 남측 인사 12명과 함께 우이동 몽양 묘소로 떠났다는 소식이다. 사진기자들은 장면을 놓칠까봐 일단 뛰기 시작했고 취재기자들도 환영공연 소식과 참배소식을 동시에 쓰기 위해 더 바빠졌다.

대변인실은 그제야 몽양 묘소에 여 의장이 참배 다녀온 게 맞다고 공식 확인했다. 여 의장은 첫날 이후에도 남측에 생존해 있는 혈육들이 갑작스레 워커힐로 찾아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셋째날에는 워커힐호텔 비즈니스룸에서 인터넷으로 ‘몽양 여운형 선생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 청원 서명운동’에 동참하는 등 누구보다도 행복한 통일대회를 보냈다.

혼란 속에 얻은 수확

16일은 사진전이 문제가 됐다. 전시회는 애초 3시 30분 개막 예정이었는데, 북측의 전시작품 선정을 둘러싼 마찰로 1시간 40여분이 지난 후 시작된 것. 문제가 된 사진과 그림은 북송 비전향장기수 리재룡 씨(59세)가 보낸 감사서신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득녀 축하 메시지를 덧쓴 답장의 편지가 찍힌 사진과 그림 중에서 ‘김정일화(花)’가 새겨진 자수 작품이다. 북측은 이를 꼭 전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측은 이를 거부하다 토론 끝에 모두 전시하기로 합의했다.

이처럼 전시 당일 이 같은 문제가 불거진 것은 애당초 사진과 작품 전시에 대한 합의를 서울에 와서 결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행사 전날까지도 남측은 사진전은 명단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미술전의 경우 북측 화가들에게 큰 관심을 모으면서 애초에 240점을 출품하겠다고 제안했다가 행사규모가 축소되면서 107점으로 대폭 줄어 처음에 나왔던 작품명단과 행사 당일 내려온 작품에 차이가 컸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열렸던 ‘6·15공동선언실현을 위한 민족

공동통일 미술 및 사진 전시회’에는 북측 국보급 작품 7점을 비롯해 모두 107점의 창작품이 선보였다. 전시회에서는 월북작가들의 미술작품에 관심이 집중됐으며, 금니화, 조선보석화, 출판화 등 북한이 새로운 재료를 이용해 그린 작품들이 화제를 모았다.

행사 지연은 잃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북측 대표단이 가지고 있던 긴장된 분위기가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오히려 남측 기자단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전시장 밖에서 만난 남북측 대표들이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북측 여성대표단은 기자에게 서울에 온 소감을 말하려다 지은희 민화협 상임의장을 보자 단박에 달려가 손을 잡았다. 반가워하는 북측여성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지은희 의장은 기자에게 고개를 돌려 눈짓을 하며 웃음을 지었다. “반가워요. 서울에서 보니 더 반가워요. 잘 지내셨나요?”라고 안부를 주고받고, 최근 여성계는 어떤 일을 하냐고 질문을 하다 둘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북한의 기자도 만났다. 림경수 내나라 비디오 기자는 남측 기자들이 “북한측은…”이라고 질문을 시작하자 대뜸 용어정리부터 한다. “고저 기자란 양반이 공부를 해야겠구먼. 북한측이 뭡네까. 북측이지. 남측, 북측 아닙네까” 북한이 남한을 남조선이라고 부르지 않듯 서로 싫어하는 용어를 쓰지 말자는 주장. 이 같은 이야기를 들은 후 인터넷 매체들은 그동안 북측과 북한측으로 혼용되어 쓰던 용어를 모두 북측으로 통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리창덕 북측 민화협 사무소 소장은 “서울에 와서 보니 우리나라 삼천리는 다 비슷한 것 같다. 조국의 명산들을 다 실제로 보고 싶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를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아…압네다. 이름은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렇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은 모르갔는디요”라고 말하며 『참여사회』와 참여연대의 차이를 질문하기도 했다.

가장 큰 인기를 모은 북측 대표단은 조선학생위원회 지도원 장연희 씨(24세)였다. 특히 남측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공세와 이름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왜 이리 자꾸 묻습네까. 이름 닳겠습네다”라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두고두고 남측대표단과 기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한 북측대표는 몰려다니는 남측기자들에 질렸는지 “이 대회는 누구를 위한 대횝니까. 기자들을 위한 대횝니까? 공통점이 수백배는 되는 데 왜 자꾸 다른 점만 묻습네까”라고 혼자 혀를 차는 모습도 모였다.

개막전의 이러한 분위기 때문일까. 지연된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전시회는 남북측 대표단들이 보다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사진과 미술을 관람할 수 있었다.

한 북측대표는 전시된 사진 중에 자신의 얼굴이 나오자 “여기 보시라요. 여기 제가 나와 있습니다”라고 자랑하며 사진에 대한 설명을 신바람나게 해줬다.

최성룡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은 정현웅 작가의 ‘누가 키가 더 큰가’라는 작품을 설명하며 “이 그림 속에 작가의 아들이 있다”며 “이제는 60살인 아들이 얼마 전 북조선에 왔다가 이 작품 앞에서 6번 인사를 올리고 울었다”고 전해 주변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김봉주 작가의 ‘통일렬차 달린다’라는 작품에는 “독도를 표현하며 여자아이를 그렸다가 남자로 고쳤는데, 이는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라서 그렇다”고 설명해 관람단의 웃음을 자아냈다.

부문별 상봉에 거는 기대

16일 오전에는 종단, 민화협, 통일연대, 여성, 노동, 농민, 문예, 청년, 언론 등 각 분야별 부문 상봉 모임이 열렸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남과 북이 함께 만나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고 구체적으로 진행됐고 이는 앞으로 다양한 방식의 남북교류를 점칠 수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독도 영유권 수호와 일본의 과거청산을 위한 과제’라는 주제로 토론을 가지기도 했다.

이수호 전교조 위원장은 노동부문 상봉에 참여해 “아직 남북 교육자간의 교육에 대한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밝히며 “남북한이 교육문제를 논의하고, 교과서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교사중심의 교육교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처음 이틀동안은 행사가 지연되는 등의 차질이 많았지만 이날은 오히려 오후로 예정되었던 폐막식을 학술토론회에 이어 진행하는 등 빠른 진행을 보였다. 이에 대해 대변인실은 “행사시작 전에 가지고 있던 일정은 모두 계획일 뿐이다. 남측과 북측은 매일 다음날 행사진행에 관해 토론했고 거기서 합의되고 결정되는 것을 따랐다. 민족통일대회가 열리기 이전에 나온 행사진행표를 가지고 프로그램이 변경된 이유를 자꾸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행사의 모든 면을 북측과 대화를 통해 논의해서 결정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번 통일대회에 가장 말썽이 많았던 것은 행사지연문제였다. 사고를 우려해 행사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게 아니냐는 비난도 많았다. 그렇지만 언론의 보도와는 다르게 행사장에서 행사지연으로 속이 탄 것은 사실 기자뿐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민간이 서울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행사를 진행하면서 미숙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진행은 없었다. 행사가 지연되더라도 비공식적으로라도 남측과 북측의 대표단은 자연스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2박3일 동안 마주치면서 서로 이름은 모르더라도 눈웃음을 주고받는 편한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다. 서울에 와서 먹은 음식이 자신이 먹기에 좀 짜다는 등 시시콜콜한 수다 떠는 광경도 봤다.

북측도 남측도 이번 대회를 계기로 민간교류의 활성화 여부가 판가름 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행사진행의 결과보다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했다. 이건 분명 희망이다. 민간교류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분야별 교류도 급진전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택시에서 파란 지도가 그려진 깃발을 본 운전기사는 “손님 모시고 백두산까지 가야겠죠?”라고 소원을 말한다. 자주 봐야 마음도 열리고 대화도 통하는 법이다

황지희(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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