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1월 2004-01-01   666

[회원마당]<역사로 풀어보는 사회이야기> 1789년과 2003년 ‘철거’ 풍경

2003년 11월 28일 상도2동에서는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다. 건설업체가 고용한 용역철거반이 세입자 철거민들의 보금자리를 강제철거하려다 일어난 일이다. 화염병과 염산병을 던지고, 사제총으로 쇠구슬을 쏘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러한 전쟁은 이틀 후 청계천에서 재발했다. 서울시가 공무원과 경찰, 용역철거반을 동원해 옛 청계고가 부근의 노점상들을 강제로 철거한 것이다. 생존권을 위협받은 노점 상인들은 폐타이어와 나무판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휴대용 가스통에 불을 붙이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서울시는 지게차, 포크레인, 덤프 트럭 등의 장비와 경찰과 용역철거반 등 공권력을 동원했다.

1789년(정조 13) 7월, 수원부사 조심태는 읍내의 노인들과 아전들, 하급군인들에게 앞으로 두 달 안에 각자 살던 집을 철거하고 이사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사할 곳은 수원도호부에서 북쪽으로 걸어서 반나절 정도의 거리에 있는 팔달산 아래였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서울에서 수원도호부로 옮기면서 읍내의 모든 건물을 철거하고자 했다. 아무리 봉건왕조 시대라고 하지만 주민들은 순순히 명령을 따르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보상비 자체를 거부했고, 어떤 사람은 보상비를 받고도 이사를 가지 않았다. 정조의 행적을 기록한 『일성록』에는 주민들에게 준 이주비용이 기록되어 있다. 초가 삼 칸에 사는 한량 이익상 여섯 냥, 초가 사 칸에 사는 궁수 이복돌 집값 다섯 냥, 이주비 열한 냥, 스물 두 칸에 교련관 김태서 집값 쉰여섯 냥, 이주비 서른 닷 냥 등…. 당시 쌀값은 한 섬(石, 대략 160kg)에 3냥 정도였는데 이주비를 받은 주민들이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듯 권력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철거와 신도시 건설을 강행했다. 주거권이나 생존권이라는 인간의 기본권 보다는 개발논리가 앞섰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화성건설뿐만 아니라 일산.분당.과천.목동.강남.상계동.상도동.봉천동 등의 아파트 건설과 청계천 재개발도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치르듯이 폭력적으로 진행했다.

도시가 재개발된 이후 새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 지역 원주민들의 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 있을까? 주테크(住Tech)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만든 부동산 투기를 미화하는 희한한 용어다. 아파트나 상가, 토지를 싼 값에 사서 비싸게 팔아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합리화된다.

그러나, 집과 토지는 수익을 내는 상품 이전에 사람의 생존과 주거를 확보하기 위한 공공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0년의 세월은 우리에게 새로운 철거의 풍경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박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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