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1월 2015-12-28   1203

[만남]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 조은미 회원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조은미 회원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사진. 이영미 참여연대 미디어홍보팀 간사

 

5년 전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도 겨울이었다. 아카데미 느티나무 홈페이지에 실리는 수강생 인터뷰를 위해 얼굴도 모르는 그녀와 종로구청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 기상청에서는 최저온도가 -11℃라고 했다. 턱을 덜덜 떨며 우두커니 그녀를 기다리던 구청 앞 계단.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과 곧바로 시뻘건 김치찌개를 함께 나누어 먹었던 식당. 낯선 이에게 다정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내가 미처 알 수 없는 것들이 담겨 있던 그녀의 또랑또랑한 눈망울….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르고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한 또 한 번의 겨울날, 돌이켜보니 난 그녀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참여사회 2016년 1월호

 

생명이 국경보다 더 소중하다

5년 전 모습 그대로 그녀가 내 앞에 앉아 있다. 늘 그랬듯 친절한 미소를 띠며 인터뷰를 위해 모인 일행들에게 따듯한 차를 권하는 그녀에게 나는 대뜸 왜 처음에 인터뷰를 고사했느냐고 물었다.
“2016년 새해 첫 회원인터뷰라서요. ‘신년’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건데 저 말고 좀 더 희망찬 말씀을 할 수 있는 분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거죠.”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것들 앞에 ‘새’ 혹은 ‘처음’이라는 단어를 붙여대는 1월. 그러나 아무리 ‘새해’의 고운 의미를 곱씹어 보려 해도 난 3년 전 대선이 끝나고 맞이해야 했던 그해 1월의 암울한 기운만이 느껴졌다.
하시는 일부터 소개 좀 부탁드려요.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에서 재무와 사무를 담당하는 매니저로 있어요. 2009년부터 근무했는데, 그전까지는 일반 직장에 다니며 NGO의 회원이기만 했지 활동가로 직접 일한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이쪽 분야에 늘 관심이 많았죠.” 

1971년 파리에서 시작된 ‘국경없는의사회’는 국제 인도주의 의료구호단체로서 세계 28개국에 사무소를 두고 있고…, 인터넷에 더 자세하고 긴 설명이 있었으나 여기까지 쓰다 멈추었다. ‘정치·종교·경제적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설립목적에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 어떤 잣대도 거부하고 차별 없는 도움을 주겠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그들의 선언에 나는 왜 울컥한가.
“저희도 다른 국제 NGO처럼 모금과 홍보, 현장에 활동가들을 파견하는 등의 일을 해요. 시민들의 후원금이 재정의 90% 가까이 차지하고, 한국사무소만 해도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회원이 2만 3천 명이고요. 올해만 54억 정도의 금액이 모였어요. 이 돈은 올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에볼라처럼 전염병 발생지역이나 시리아, 예멘과 같은 분쟁지역의 난민들,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지역민들, 예방접종 사업이 절실한 지역 등을 돕는 데 쓰입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창립 때부터 개인 기부금으로 재정의 대부분을 충당했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개별정부의 직접지원은 모두 거부하며 군수산업체의 지원 또한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체 예산의 80% 이상을 구호활동에 사용한다는 것. 기부금의 상당액을 단체 운영비로 쓰는 구호단체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니 ‘생명이 국경보다 더 소중하다’는 그들의 선언이 참으로 단단하게 느껴진다. 

 

아직 탯줄을 끊지 않은 사람

NGO 단체에서 일하면서도 그녀는 다양한 시민단체에서 회원으로, 자원활동가로 오랜 시간 활동해왔다. 그중에서 특히 ‘환경운동연합’과의 인연은 무려 20년이 다 되어간다. 5년 전 그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환경운동연합에서는 주로 국제연대와 관련된 분야에서 활동을 했어요. 제가 처음 환경운동연합에 갔을 땐 그분들도 자원활동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잘 모를 때였죠. 새만금 관련 행정재판 때 관련 서류를 번역하기도 하고 재판을 방청하기도 하면서 현장성이란 게 어떤 건지 느낄 수 있었죠. 엠네스티에서는 주로 외국인그룹 코디네이터 역할을 했고요. 여러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했지만 가장 보람된 건 좋은 사람들과 맺게 된 인연들이에요.”

자신이 유독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건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서 자연의 혜택을 듬뿍 받은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20년이란 세월을 환경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한 것, 녹색당의 당원이 된 것 모두 그 혜택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을 빌려 말하면 그녀는 ‘자연과 아직 탯줄을 끊지 않은 사람’이다. 
“요즘 가장 관심이 가는 환경문제는 ‘탈핵’이에요. 얼마 전 제가 하는 독서모임에서도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함께 읽었어요. 체르노빌 원전 사고 피해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은 증언집이에요. 장르는 비문학인데 굉장히 문학적 깊이가 있는 작품이라 무척 감동적이었죠. 다 읽고 서평을 <오마이뉴스>에 기고하기도 했어요.” 

나도 그 책을 읽었다. 원전사고 자체보다는 그 이후 벌어지는, 지옥의 불길 위에서도 삶을 이어나가야 했던 이들의 서글픈 증언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는 책이었다. 뭇 생명들이 응당 내뿜어야 할 삶의 비린내가 방사능에 의해 모두 불살라진 자리에 서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이 문장 하나가 던지는 경고의 무게에 내 온 존재가 짓눌렸다.

그녀가 기고한 서평을 찾아 읽는다. 서평 끝머리에 ‘핵발전소 결사반대’라고 쓰인 붉은 띠를 두른 그녀의 사진도 보인다. 얼마 전엔 독특한 가면을 쓰고 집회에 참가하기도 한 그녀다.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집회문화에 대해 그녀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제가 참석한 12월 5일 집회 이름이 ‘민중총궐기대회’였어요. 민중, 궐기 이런 낡은 말에 과연 일반시민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요? 무대가 있고 그 앞에 선 사람들은 무작정 구호를 따라하고 마지막엔 ‘청와대로 가자’고 외치는, 이런 경직된 집회문화는 좀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으로는 집회에 나오지 않는 다수의 시민들과는 또 어떤 방식으로 소통을 해야 하나 싶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가 참 많죠.”

 

참여사회 2016년 1월호참여사회 2016년 1월호

 

문학의 숲

그녀는 요즘 개인적인 활동에 더 집중하느라 시민단체에서의 활동이 예전보다 좀 뜸해졌다고 말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문학의 숲’이란 독서모임이다. 
“처음엔 남편과 아들, 저 이렇게 세 명이서 시작했어요. 지금 104회까지 진행했는데 남편은 직장 다니면서도 또 저녁에 대학원에도 가야 하는 빠듯한 일정에도 북클럽엔 반드시 참여할 정도로 열성적이에요. 제 아들도 어지간해선 모임에 빠지지 않죠.”

가족 모임으로 소박하게 시작한 ‘문학의 숲’은 현재 회원이 30명이나 될 정도로 성장했다. 한 달에 두 번, 주말마다 과천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모임을 가진다. 주말인데도 쉬지 않고 서울이나 일산, 용인 등지에서 달려오는 이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단순한 독서모임이 4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비결이 뭘까요? 혹시 그 어머어마한 양의 다채로운 음식들?
“하하하, 먹을 것도 하나의 비결이죠. 정성 들여 차린 음식은 환대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무척 중요하거든요. 마음이 담긴 음식을 함께 나누다 보면 이 모임이 나를 향해 언제나 ‘문 열어놓고 있다’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단순히 책만 읽으러 오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혹은 함께하는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오는 거죠. 책을 통해 형성된 이 조그마한 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세상으로 확대할 수 있을까 요즘 고민이 많아요.”

 

단순히 모임의 규모를 키우는 게 아닌, 책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굳어진 삶의 방식을 깨뜨리고 그 흐름이 세상 밖으로까지 이어지게 하는 것, ‘문학의 숲’이 꾸는 꿈은 이렇게 울창하다. 
“100번째 모임 때는 회원들하고 통영에 1박 2일로 문학기행을 갔어요. 그때 읽었던 책이 이순신의 『난중일기』였거든요. 남편이 그 책을 너무 좋아해서 참고서적을 10권 정도 쌓아놓고 발표준비를 하고 또 여행 가서는 가이드도 하고 그랬답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황지우 시인의 이름을 딴 아들 지우 군도 책 사랑이 대단하다. 평생 농사만 짓느라 책 한 권 읽어 본적 없는 할머니에게 시집을 선물하는 손자. 시집 제목은 『엄마』였다. 저런 따스한 마음을 가졌으니 이제 좀 잘못해도 좋게 봐주자고, 그날 그녀는 굳게 결심했다. 
“저희 어머니, 아마 누구한테 책을 선물로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실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저희 독서모임에서도 평소 책을 접하기 어려운 할머니나 할아버지들께 『심청전』 같은 고전을 낭독해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만족만이 아닌 그걸 넘어서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에요.”

 

마지막으로 참여연대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참여연대의 새로운 시도들이 굉장히 좋아요. 앞으로 시민운동에도 많은 상상력과 다양한 소통의 방식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참여연대를 보면서 회원으로서 뿌듯하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참여연대가 앞장서서 으쌰 으쌰 해주면 좋겠어요. 저도 함께 할게요.”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새해 계획으로 다이어트와 벨리댄스를 꼽는 그녀에게도 2016년이 마냥 설레지만은 않다. 어떤 ‘높으신’ 분의 표현대로 혼이 정상인 사람들에겐 그저 달력의 숫자 하나가 바뀌는 것일 뿐, 시대의 우울은 해가 바뀌어도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많은 이들이, 특히 최소한의 상식이나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 정부 밑에서 좌절에, 좌절에, 좌절을(그녀는 이 단어를 정확히 3번 말했다) 겪고 있잖아요. 세월호도 하나도 해결된 게 없고 국정교과서 추진 문제도 그렇고. 우리가 아무리 목소리를 내도 바뀌는 건 하나도 없고. 이렇게 켜켜이 쌓여가는 좌절감들을 딛고 뭔가 희망의 언어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신년 인터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나라의 반이 넘는 수가 반대해도 단 한 사람의 의지대로 굴러가는 세상. 한겨울 거리에 나와 소리치는 시민들을 차디찬 물줄기로 쓰러뜨리는 권력. 그 앞에서 나의 짙은 좌절감은 이내 두려움으로 변한다. 내 목소리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이 세상이 난 두렵고 또 두렵다.
“저도 희망을 얘기하고 싶죠. 근데 지금 같아선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세상 걱정이 많은 친구들한테 참여연대에 가입하라고 권유하는 정도죠. 제가 아는 방법은 이것뿐이네요. 어쨌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책의 한 구절을 다시 읊는다.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그래, 이 두려움이 끝내 나를 길 잃지 않게 할 것이다. 스스로를 향해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순간, 의식의 밑바닥을 뚫고 절규하는 한 시인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새해는, 누군가에게 빼앗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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