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2월 2010-02-01   1262

김재명의 평화 이야기_아이티 비극의 뿌리, 미국의 탐욕



아이티 비극의 뿌리, 미국의 탐욕


김재명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 성공회대 겸임교수(정치학 박사)

어떤 한 나라에서 내전의 유혈사태가 터지거나 엄청난 지진이나 해일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쑥밭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치자. 그런 탓에 중앙정부의 행정기능이 마비되고 군대와 경찰이 치안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치자. 법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주먹이 앞서는 그 나라꼴은 한마디로 한심한 상황이 된다. 공권력이 붕괴된 탓에 법 없이도 살아갈 선량한 보통사람들이 고통 받는 무법천지의 국가를 일컬어 국제사회에서는 ‘실패한 국가’Failed State라 한다. 무장괴한들이 유조선이나 화물선의 선원들을 납치해 인질로 삼고 돈을 챙기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아프리카 동북부의 소말리아가 대표적인 보기다.



34번의 쿠데타와 미국의 묵인

2010년 새해를 맞자마자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17만 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아이티가 바로 그런 ‘실패한 국가’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지진으로 집을 잃고 구호품을 기다리다 굶주린 군중들은 거리를 헤매는데도, 이 나라 대통령과 집권당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일부 아이티 젊은이들이 몽둥이나 칼을 든 떼강도로 변해 대낮에 거리를 설치고 다녀도 경찰이 나설 엄두를 못 냈다. 중앙정부가 제대로 대응할 능력이 없기에 혼란은 더 커졌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 즉 인재다.

아이티는 인구 9백만 가운데 약 80%가 하루 2달러 이하의 돈으로, 54%가 하루 1달러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는 중남미 최빈국이다(일반적으로 하루 생계비 2달러는 ‘빈곤’을, 1달러는 ‘절대빈곤’을 뜻한다). 가난에 찌든 아이티 사람들에게 지진이란 자연의 재앙은 더욱 큰 상처로 다가왔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문제는 그동안 아이티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해온 강대국 미국에도 책임이 크다는 점이다. 아이티의 비극을 말하면서 미국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사회주의 정책을 펴는 이른바 좌파정권들이 중남미에 여럿 들어서 있지만, 20세기의 중남미는 아예 미국의 뒤뜰이었다. 미국은 군대를 보내거나 해당국가의 군부를 움직여 입맛에 맞는 독재정권을 세우고, 현지 국민들의 신음소리에도 아랑곳없이 그 정권을 지지해왔다. 그 나라가 민주냐 반민주(독재)냐는 뒷전이고  친미냐 반미냐, 그래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지켜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미 대외관계의 잣대였다.

남미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정권을 세웠던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뒤엎은 피노체트 장군의 군부쿠데타(1973년)에 미국이 깊숙이 개입해 칠레에서의 미국 투자 자본을 지키고 키웠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레나다(1983년), 파나마(1989년), 아이티(1994년)에 미 해병대 병력을 상륙시켜 정권을 바꾸었다. “민주주의를 심는다”는 명분 아래 이뤄진 미국의 개입 속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숨어 있음은 물론이다. 아이티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아이티의 정치에 깊이 개입을 해왔고, 때로는 군대를 보내 점령을 하기도 했다. 20세기 전반기에 미국은 20년 동안(1915-1934년) 아이티를 점령해 사실상 식민지로 다스렸다. 아이티 대통령은 이름만 대통령이지 미국이 내세운 허수아비였다.

지금껏 아이티는 무려 34번의 군사 쿠데타를 겪었다. 그때마다 아이티 사람들이 겪은 정치적 악몽이 어떠했을까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미국은 아이티의 권력자가 미국의 중남미 지배구도에 협조적이라면 그의 독재를 묵인해주고, 그가 민심을 너무도 크게 잃어 미국의 국가이익을 지켜줄 상황이 못 된다고 판단되면 다른 독재자로 갈아치우곤 했다.


카터와 베이비 독 독재 공생의 후유증

그 대표적인 보기가 2대에 걸쳐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뒤발리에 독재체제다. ‘파파 독’이라고 불린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쿠데타로 집권한 뒤부터 폈던 공포정치는 무려 24년 이어졌고(1957-1971년), 그가 죽자 겨우 19살 난 아들 ‘베이비 독’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권력을 이어받아 15년 동안 철권을 휘둘렀다(1971-1986년). 수만 명의 정치적 비판자가 처형되는 현실에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져도, 미국 워싱턴의 지도자들은 그냥 눈감아 주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쟁 개입 논란, 닉슨 대통령을 탄핵으로 물러나게 만든 워터게이트사건 등의 영향으로 ‘도덕성’이 정치적 담론으로 떠올랐었다. 바로 그 무렵 미 대통령에 뽑혔던 카터(대통령 재임 1977-1981년)는 미 정치인 가운데 도덕적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카터조차도 “미국의 전략적, 경제적 이익(미국 투자와 교역에 따른 이익)과 맞아떨어질 때는 독재정권이라도 상관없다”는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티 독재와 공포정치를 모른 채 넘어갔다(아이티뿐만 아니었다. 아르헨티나, 칠레 등 중남미 군사독재정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후반, 미군으로부터 훈련과 군사 장비를 지원 받은 니카라과 정부군이 소모사 독재에 항거하는 국민들을 4만 명이나 학살했지만, 워싱턴 백악관의 카터는 그에 대해 침묵했다).

1990년 민주적 선거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 속에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 가톨릭 신부 출신의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였다. 그는 남미의 진보적인 해방신학자 출신으로 오랜 독재와 부패로 만신창이가 된 아이티를 양심적으로 새로 건설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인구 5%인 물라토(흑인과 백인의 혼혈)를 주축으로 한 기득권층과 싸우며 사회개혁을 통해 인구 95%인 다수 흑인의 빈곤문제를 줄여보려던 그는 그러나 두 번의 쿠데타를 견디지 못하고 망명길을 떠나야 했다. 2004년 반군이 수도 포르토프랭스로 진격한다는 보고를 받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미 대사관을 지키기 위해 해병대원 50명을 파견했을 뿐, 아리스티드의 몰락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그 뒤로 아이티엔 유엔평화유지군 9천 명이 진주해 사실상 아이티는 ‘국제사회의 보호령’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



21세기 신식민주의와 민초들의 고통

부시는 왜 아이티 쿠데타를 적극 막지 않았을까. 어떤 이들은 카리브 해에 자리 잡은 아이티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아이티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 쿠바를 견제하려면 아이티 독재정권이 친미정책을 펴는 한 미국은 그 정권을 지지한다는 얘기다. 부분적으로 맞는 얘기지만 결국은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초점이 모아진다. 지금 아이티 경제는 완전히 미국에 예속된 상태다. 이를테면 지난 1986년 ‘자유무역’을 내세우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밀려 수입 미국 쌀에 대한 관세가 없어지는 바람에 아이티 농업은 몰락했다. 아직도 아이티 국민의 절반은 농부로 분류되지만 극소수의 농장주를 빼고는 절대빈농들이다.

농사일을 포기한 농민들이 수도인 포르토프랭스로 몰려들었고(정확히 말해, 농촌에서 도시 외곽의 빈민촌으로 쫓겨났고), 기껏해야 미국계 기업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그들이 살던 빈민촌은 이번 지진을 견디지 못해 무너졌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 지진으로 촉발된 아이티의 재난에 미국이 져야 할 책임이 크다는 지적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아이티의 비극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정치적 억압구조 그리고 이를 묵인하고 자국의 정치경제적 이득을 위해 활용해온 강대국 미국의 신식민지 지배구조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이티 지진을 계기로 21세기 신식민주의의 음험한 본질과 그것이 지구촌의 가난한 민초들에게 끼치는 고통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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