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5월 2007-05-01   1462

메이데이, 이어지는 것과 잊은 것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영어로는 메이데이(May Day)라고 불리는 전 세계 노동자들의 잔칫날이다. 한국에서도 매년 이 날이 되면 양대 노총이 주최하는 집회나 시위가 벌어진다.

메이데이는 언제 어느 나라에서 비롯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1886년 미국의 헤이마켓 사건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이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스파이스라는 미국 노동자가 남긴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리라” 는 말은 메이데이 집회의 연설에서 빠지지 않는 명언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 몇 개 더 있다. 메이데이의 뿌리가 1850년대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 사실 그 발상지는 엄밀히 말해 미국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메이데이가 정착되는 과정에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역할이 컸다는 게 그것이다.

 

8시간 노동의 꿈에서 싹튼 메이데이

메이데이의 발상지는 유럽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다. 뜻밖에도 그곳은 오스트레일리아다. 1856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기 위해 하루 날을 잡아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축제를 벌이기로 했다. 말하자면 ‘불법’ 파업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자들이 정한 날짜는 4월 21일이었다. 처음에는 연례행사로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첫 해의 결과가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계속 매년 4월 21일에 노동자들의 ‘무단’ 휴일을 갖기로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자들의 이 전통이 미국 노동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 노총은 1884년 열린 제4차 대회에서 2년 뒤인 1886년 5월 1일 하루 8시간으로 노동 시간을 단축할 것을 주장하며 대대적인 파업과 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했다. 2년간의 준비 끝에 드디어 다가온 1886년 5월 1일에 모두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았다.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성대한 집회를 벌였다.

위에서 말한 헤이마켓 사건은 바로 이 파업의 뒤끝에 벌어졌다. 당시에 이미 미국 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른 시카고에서는 5월 1일 시위의 여파가 며칠간 계속됐다. 그래서 3일 뒤인 5월 4일에도 시위가 벌어졌다. 바로 이 날 시위대가 헤이마켓 광장에 이르렀을 때 어디에선가 폭탄이 날아들었다. 그러고 나서 격한 무력 충돌이 있었고, 이 와중에 4명의 노동자와 7명의 경관이 숨졌다. 당국은 별다른 증거도 없이 시위 주동자들을 폭탄 테러범으로 몰아 교수대에 세웠다. 파슨즈, 스파이스, 피셔 그리고 엥겔이라는 4명의 노동자가 순교자가 됐다.

호주에서 시작돼 미국 거쳐 세계 노동자의 날로

하지만 이런 탄압에도 미국 노동자들은 굴하지 않았다. 1888년 대회에서 미국 노총은 2년 뒤인 1890년 5월 1일을 다시 투쟁의 날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 이듬해인 1889년 7월 14일, 파리에는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유럽 각지의 노동자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하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원들, 파리 코뮌의 학살 이후 어렵사리 재기하는 중이던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 영국 노동조합 내의 진보적 투사들, 동유럽의 혁명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각국 노동자정당의 국제 본부이자 전 세계 노동자들의 조직으로서 국제노동자협회, 즉 인터내셔널의 재건이 결정됐다. 1876년 해산한 제1인터내셔널에 이어 제2인터내셔널이 건설된 것이다.

이 때 프랑스 쪽 대의원 라비녜가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만국의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이 제안은 열광적인 동의를 얻었고, 미국 노총의 투쟁이 예정되어 있던 1890년 5월 1일이 국제 노동자들의 행동의 날로 정해졌다. 공통의 요구는 ‘8시간으로의 노동시간 단축’이었다.

유럽에서의 첫 메이데이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축제일만은 아니었다. 탄압을 피하기 위해 5월 1일이 낀 주의 주말에 행사를 가진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근무일인 5월 1일 출근하지 않고 집회 장소에 모여들었다. 화창한 5월, 드디어 착취 받는 자들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제야 시간은, 삶은 그들의 것이 되었다.

메이데이 기억 상실증 걸린 미국

그 이후 메이데이는 전 세계 노동자들의 공통의 명절로 지속되고 있다. 100여 년 전과는 달리 이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메이데이가 법정 휴일이라 ‘파업’의 의미는 사라졌지만 말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분단 이후 한동안 메이데이가 금기시됐고, 비교적 최근까지도 노동자들이 메이데이를 기념하는 것은 여전히 ‘불법 파업’의 성격을 띠었다. 하지만 우리도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메이데이는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달력에 당당히(?) 등장한다.

한데,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메이데이의 전통이 망각된 나라가 있다. 그것은 메이데이의 등장에 커다란 역할을 한 바로 그 나라, 미국이다. 미국은 메이데이가 아니라 9월 첫 월요일을 ‘노동절(Labor Day)’로 기념한다. 여기에는 미국 지배계급의 의도적인 선택이 영향을 끼쳤다. 1880년대 미국 노동계에는 노총과 경쟁하던 또 다른 운동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은 노총에 비해 보수적인 성격이 강했고, 국제 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과의 연계도 약했다. 이들은 5월 1일을 노동자의 휴일로 삼자는 노총의 계획에 맞서 9월 첫 월요일을 노동절로 지정하자고 주장했다. 그런 가운데 1886년에 헤이마켓 사건이 터지자 당시 미국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주저하지 않고 ‘9월 노동절’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1887년 미국 정부는 9월 첫 월요일을 노동절로 정했다.

메이데이는 아무래도 노동시간 단축 운동, 국제사회주의운동, 그리고 파업 투쟁을 연상시켰다. 미국 정부는 메이데이의 이러한 상징성을 피하고 망각시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미국의 노동자들은 메이데이를 잊고 있다. 미국 노동운동 내에서 메이데이를 되찾자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주장은 종내 힘을 얻지 못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외면 받는다는 복음서의 구절처럼, 메이데이야말로 그 발상지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맥 빠진 기념식 대신 노동자들에게 꿈을

그런데 요즘 보면 메이데이를 둘러싼 ‘기억상실증’이 미국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다른 나라들도 비록 메이데이 행사를 매년 반복하기는 하지만, 막상 이날 무엇을 기념해야 하는 것인지는 잊고 있는 듯 보인다. 메이데이에 되새겨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한 세기 전 미국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메이데이가 불온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이유들, 바로 그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노동해방의 명확한 지향, 전 세계 노동자들의 공동행동이라는 ‘국제연대’의 살아 있는 이상 등. 19세기 말의 세계 노동운동에는 ‘8시간 노동제 쟁취’라는 선명하고 구체적인 공통의 요구가 있었는데, 요즘 지구 곳곳의 메이데이 기념식장에는 그런 슬로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공감대는 존재하지만,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지금 가장 시급한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열렬한 토론이나 굳건한 합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지금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미 100년 전에도 메이데이가 투쟁의 결의보다는 맥 빠지는 기념식들로 채워지는 것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본 사람들이 있었다. 짜르 정부의 탄압을 피해 서유럽에 망명 와 있던 레닌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부인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이 야유회와 문화 행사로 가득 찬 독일의 메이데이 풍경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하는 장면을 회고록에 남기고 있다. 레닌은 확실히 눈이 너무 높았다.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이처럼 항상 정치적 긴장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레닌의 그 차가운 시선이 더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 시대의 메이데이는 레닌을 실망시킨 저 한 세기 전의 독일 메이데이보다 훨씬 더, ‘행사를 위한 행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8시간 노동제’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 다른 대륙의 노동자들을 한 마음으로 만들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형제’ ‘자매’로 부르게 만들 공통의 꿈, 집단적인 희망이 그립다. 우리의 메이데이는 다시금 그러한 꿈과 접속되어야 한다.

장석준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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