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5월 2007-05-01   697

열정

“연기 수업을 받아 보지 않겠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푸르른 19살, 나는 교대를 다니고 있었고 방학을 이용해 인형극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때 우연히 심부름 차 들렀던 공연 기획 사무실에 계시던 한 선생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서울에서 왔고, 한 때(?) 인정받았던 배우라며, 지금은 여러 사정으로 그만두었지만 학생이 배우고 싶다면 기초나마 간략하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네.” 라고 답했다. 꼭 배우고 싶다는 확신에 찬 짧은 대답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날의 만남 이후, 그 분의 수제자가 되어 무던히도 더웠던 1999년 여름 방학 내내 아침 7시부터 신체훈련을 시작했다. 처음 접해 본 생소한 수업이었기에 나는 조금 더뎠고,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날 때도 있었지만 수업이 끝난 후 들려주셨던 연극과 예술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은 처음 만난 낯선 세계처럼 늘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시간이 날 때면 선생님께서 하셨던 일을 조금이라도 도울 요량으로 시내에 나가 공연 포스터를 붙이고, 공연 프로그램을 판매하곤 했다. 선생님 덕분에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는데, 연극배우 윤석화 씨가 지방 공연 차 내려 왔을 때 벅찬 마음에 한 마디 인사 조차 하지 못했던 아쉬움은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재미있고 가능성 있는 다양한 직업이 존재하고 있고, 꿈을 좇아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막연하게나마 깨달았다.

이후 선생님께서 준비한 공연은 성공리에 끝났고, 선생님은 서울로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깊은 울림을 잊을 수 없었던 나는 다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선생님께서 나의 성급한 결정을 꾸짖으실 것 같은 두려움과 자신 없는 마음에 훗날 꼭 성공해서 당당한 제자가 되겠다는 다짐만 되새겼다.

졸업 후, 꿈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현실을 선택한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토록 존경하고 그리워했던 선생님의 기사를 우연히 접할 수 있었다. 고(故) 김시라 선생이 연출하셨던 3대 품바이신, 연기를 다시 시작해, 얼마 전 미국 공연을 잘 마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때의 벅찬 마음과 여운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젊은 날의 성급했던 결정과 후회, 그리고 또 다른 선택의 길 뒤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인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지나쳐 갔던 그리운 사람들이 생각난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완성하겠지만 선생님께서 깨닫게 해준 ‘열정’이란 단어를 늘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싶다.

안설희 참여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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