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5월 2013-05-10   3759

[참여연대史] 작은 것도 치열하다 – 1997~ 작은권리찾기운동

참여연대 20년 20장면 Scene #09

작은 것도 치열하다 

1997~ 작은권리찾기운동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변호사)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호에서는 일상에서 침해당하는 시민의 작은 권리들을 지키기 위해 펼쳐진 작은권리찾기운동의 활동 사례들을 짚어봅니다. 

 

 

참여사회 2013년 5월호 (통권 198호) <참여연대 20년 20장면>

 

서울지방법원은 2002년 1월 17일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가 조계종 천은사를 상대로 제기한 문화재 관람료 부당이득 반환 소송에서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천은사는 이에 불복했지만 대법원은 2002년 8월 13일, 상고를 기각했다. 사찰의 문화재를 관람하지 않고 절 앞을 지나갈 뿐인데도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는 국립공원 입장료와 문화재 관람료 합동징수제도는 부당하다는 이유였다. 

참여연대 초기에는 권력감시운동에 주력하면서 언뜻 시민들에게 참여연대의 활동이 딱딱한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있었다. 보다 가볍고 쉽게 시민의 일상에 다가서 서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사업이 없을까 고민하게 됐다. 그리하여 1997년 3월에 출발한 기구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였다. 

* 위 판결문은 『참여사회』용 편집본임. 

 

 

 

차병직 변호사

 

 

“피고는 원고에게 천 원을 지급하라.” 

2002년 1월 17일 오전, 서울지방법원은 이렇게 간단한 선고를 했다. 원고는 당시 27세의 전동일, 피고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천은사였다. 신라 흥덕왕 3년이던 828년에 인도의 승려 덕운이 절을 하나 창건하고는, 앞뜰에 솟아난 샘물이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한다고 하여 감로사라 불렀다.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 이후에 그 샘가에 구렁이가 자주 출몰했는데, 승려가 그 구렁이를 잡아 죽이자 샘은 저절로 말라 사라졌다. 그때부터 샘이 숨어버렸다는 의미로 천은사(泉隱寺)라 하게 됐다. 

 

 

천 원의 권리

 

2000년 4월 30일, 참여연대 회원이던 전동일은 진형우, 안진걸과 함께 자동차를 몰고 천은사로 봄 나들이를 갔다. 매표소에 도착하자 매표원은 1인당 2천 원의 입장료를 요구했다. 국립공원 입장료 천 원에, 그 일대의 문화재 관람료가 천 원이었다. 세 젊은이는 문화재는 구경할 생각이 없으므로 천 원씩만 내겠다고 우겼지만, 통하지 않았다. 몇 차례 옥신각신하던 끝에 할 수 없이 2천 원씩 내고 경내 도로로 들어섰다. 대신 입장권은 잘 챙겼다. 관광을 기념하여 청춘의 앨범에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당하게 징수한 문화재 관람료를 돌려달라는 소송에 증거로 사용할 의도였다. 그들의 목적은 지리산 기슭의 꽃구경이 아니었다. 이미 흩어져버린 벚꽃의 잎처럼 무심한 사람의 눈에는 얼른 띄지 않는 작은 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861번 지방도로는 구례와 남원의 산내면을 연결한다. 구례 쪽에서 출발하면 지리산 서쪽 기슭인 방광리에 자리 잡은 천은사 일주문을 통과하여 경내 일부를 거친 다음 북쪽의 남원 실상사까지 이른다. 그 일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구역일 뿐만 아니라, 천은사는 본사인 인근의 화엄사와 함께 국보를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문화재 소유자인 천은사는 서로 협의하여 국립공원 입장료와 문화재 관람료를 통합하여 받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등산이나 산책을 즐기려던 사람들 사이에 조금씩 의문과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왜 내 의사와 관계없이 항상 일률적으로 2천 원을 내야 하나?”

 

입장료와 관람료는 자연공원법과 문화재보호법의 규정에 따라 징수할 수 있다. 법제도로 일부 주체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고 있어 그것을 공공재로 향유하는 개인에게는 부담을 주고, 그 범위 내에서 권력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언제나 시민의 눈으로 그 징수의 내용과 절차가 합당한지 살펴야 한다. 이미 설악산 신흥사에서도 문제가 됐던 입장료와 관람료 논쟁은 천은사에서 재연돼 참여연대로 가져왔고, 이상훈과 하승수 두 변호사가 맡아 1심에서는 패했으나 항소심과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참여사회 2013년 5월호 (통권 198호) <참여연대 20년 20장면>

2000년 3월 7일, 작은권리찾기 제1회 시민마당 ‘국립공원 입장료와 문화재 관람료 합동 징수 이대로 좋은가’가 열렸다. 당시 참석한 스님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활동가들을 압박하기도 했다.

 

 

작은 권리도 소중하다

 

한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활동한 독일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F. 슈마허가 1973년에 쓴 책의 제목이었는데, 훗날 세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구호가 됐다. 욕망과 과도한 경쟁을 억제하여 평화를 도모하는 인간 중심의 경제 구조의 해답은 작은 규모에 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었다. 따라서 성급한 사람들로 하여금 작은 것은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효과적이며, 편하고, 즐겁고, 영원하다는 식의 이상적 꿈에 젖어 들게 만들었다.

 

참여연대의 작은권리찾기운동이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권력감시 운동에 주력하면서 언뜻 시민들에게 참여연대 활동이 국가적 틀에 저항하는 투쟁적이고 대규모적이며, 거시적인 데다 정치적이어서 딱딱한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있었다. 보다 가볍고 쉽게 시민의 일상에 다가서 서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사업이 없을까 고민하게 됐다. 그리하여 1997년 3월에 출발한 기구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였다.

 

참여사회 2013년 5월호 (통권 198호) <참여연대 20년 20장면>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는 1997년 3월 26일 한강로 빌딩 3층에서 출범식을 개최했다. 이후 시민들의 생활 속에 불편·부당한 관행을 고쳐가는 생활 제도 개선, 생활 인권 운동을 펼쳐나갔다.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치려면 먼저 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불편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런 다음 그 불편함이 자신의 불운이나 주변 환경에 닥친 우연성의 결과가 아니라, 부당한 권리를 침해한 결과라는 인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했다. 그래서 먼저 시작한 것이 시민들의 소리를 직접 듣는 상담이었다.

 

먼저 <한겨레21>과 공동으로 ‘작은 권리를 찾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일상에서 침해당하고도 무시되기 일쑤인 작은 권리를 발굴하여 매주 두 개의 사례를 지면에 소개했다. 기사를 읽은 시민들은 제보를 했고, 운동본부는 그들의 권리 구제에 나섰으며, 도움을 받은 피해자들은 자원봉사자로 나서 또 새로운 작은 권리와 피해자를 찾아 나섰다. 시사 주간지를 매체로 한 홍보 효과는 기대에 부응하였는데, 1997년 5월에 시작한 지상 캠페인은 그해 연말까지 40회 동안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사립고교 학내 비리를 안고 참여연대의 문을 두드린 국어 교사 신정아는 자원활동가로 일하다 끝내 학교에 사표를 내고 작은 권리찾기운동본부로 와서 간사가 되어 기존의 장소영과 함께 맹활약했다.

 

1999년에는 방송을 통한 캠페인을 펼쳤다. 작은권리찾기운동에 관심을 가진 MBC 정찬형 PD와 협의하여 그가 연출하던 라디오 인기 프로 <여성시대>에 코너를 마련했는데, 김칠준, 이상훈, 최영동 변호사와 박원석이 돌아가며 출연했다. 방송 진행자 양희은, 김승현이 노련한 말솜씨로 시민의 억울한 사연을 소개하면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에서 나간 게스트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방송을 타기 시작하자 작은 권리를 찾기 위한 사람들의 전화가 빗발치듯 했고, 참여연대 사무실에 급히 설치한 10대의 상담전화 벨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찾아야 할 작은 권리들이 도처에 있었다

 

1998년 12월 7일 아침 출근 시간, 당산역을 출발한 지하철 2호선 제2105호 열차가 강남역에서 고장으로 멈췄다. 지하철공사 역무원들은 급히 승객 전원을 내리게 하였고, 뒤따라 오던 다음 열차가 고장 난 열차를 밀고 역삼역으로 가다 연결기 완충장치 파손으로 2호선 운행이 전면 중단됐다. 출근길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운행이 정상화될 때까지 약 2시간 동안 승객들은 불안 속에서 제각기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50분까지 갇혀 있었다.

 

여느 때였더라면 곤욕을 치른 회사원은 일진이 사나운 날로 그날의 운세를 규정하고 사무실에 도착하여 동료들에게 황당함과 공포감을 약간 과장하여 아침의 무용담을 떠들어댔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권리’라는 말을 들어본 깨어 있는 시민은 달랐다. 사당동에 사는 윤현영 씨를 비롯한 19명은 참여연대를 찾았고, 하승수는 즉시 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소장을 썼다. 1999년 6월 24일, 서울지방법원 판사 김종필은 원고 1인당 10만 원씩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선고했다.

 

시민들의 상담과 제보를 통한 개별적 권리 구제에서 제도 자체의 개선으로 운동은 확산됐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이동전화요금인하운동이었다. 처음에는 1999년에 한국통신의 설비비 반환을 요구하는 캠페인으로 시작됐다. 새로운 가입 제도의 방식은 통신사의 이익과 편의만 앞세운 것이었다. 1년 동안 싸움을 벌인 끝에 한국통신이 가입비 10만 원을 6만 원으로 낮추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핸드폰이 급속히 보급됐지만, 기본요금이나 통화료 같은 전화 요금의 합리성과 적정성에 대해서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가 나섰는데, 시민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2001년 여름, 요금 인하를 요구하는 서명 운동에 나서자 휴대전화를 이용하는 갑남을녀는 줄을 지었다. 부산의 권태호 씨는 “통화는 자유롭게, 요금은 부담 없이”라고 외쳤다. 서울 강남구의 민병두 씨는 “통화 품질은 개선하고, 기본요금은 없애고, 통화료는 인하하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기 위해 당시 빅히트했던 영화 <친구>의 제작사였던 씨네라인투에 연락해서 장동건과 유오성의 스틸 사진 사용의 허락을 받아냈다. 스타의 사진 아래 “마이 무따 아이가, 안 내리면 쳐들어 간다”란 카피를 넣은 대형 현수막을 제작해 참여연대 건물 벽면에 걸었다. 책상을 들고 나가 인도에 설치한 서명대는 퇴근 시간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안진걸이나 배신정을 비롯한 담당 간사들은 제 시간에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서명운동은 100만 인을 목표로 9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며, 그 모든 기록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질보다 더 방대한 양으로 묶여 현재 참여연대 지하의 영구보관실에 남아 있다.

 

참여사회 2013년 5월호 (통권 198호) <참여연대 20년 20장면>

20001년 여름, 휴대전화의 요금 인하 운동을 위해 참여연대 건물 벽면에 걸린 대형 현수막. 당시 빅히트했던 영화 <친구>를 활용하여 제작한 현수막은 그 자체로 기삿거리가 되기도 했다.

 

김칠준 변호사가 사무실에서 얻은 안식년을 참여연대에서 상근하는 데 쓰기로 하면서 작은권리찾기운동은 초반에 힘을 얻었다. 아파트공동체연구소의 설립은 참신하고 실질적 기능을 기대하게 하는 기획으로 뒤에 김남근 변호사가 사업을 이어받았고, 민변이나 환경운동연합과 연대하여 제기한 김포공항 소음 피해 소송은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작은 권리가 모이면 얼마나 커다란 가치가 되는지 공익이란 개념을 실감하게 했다.

 

참여사회 2013년 5월호 (통권 198호) <참여연대 20년 20장면>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는 민변이나 환경운동연합과 연대하여 김포공항의 신활주로 건설로 인해 소음 피해에 시달려온 주민 9,600여 명을 대리하여 국가와 김포공항공단을 상대로 원고 1인당 각 200만 원씩 총 192억 원의 사상 최대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1, 2심에서 승소했다. 사진은 1999년 8월 27일에 개최한 김포공항 소음 피해 공익소송 주민 설명회 현장.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는 MBC 라디오와 함께한 캠페인 결과를 정리해 『참여연대와 여성시대의 숨은 권리 찾기』란 단행본을 펴냈다. 그 책에서 양희은은 “결국 참여연대가 싸워야 할 대상은 무관심한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 바뀌면 나머지는 따라온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자신과 이웃의 소중한 권리를 작고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무심코 흘려버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것이 바로 박원순이 만든 ‘작은 권리’였다.

 

그 작은 책자에는 작은 권리들이 이름표를 달고 빼곡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름표를 달고 들어올 새 권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차량이 훼손된 경우, 공사 소음에 시달리는 경우, 아파트 층간 소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경우, 가게에서 신용카드 결제를 거절하는 경우, 신문 구독을 끊고 싶은 경우, 패키지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사가 부도난 경우, 114에서 전화번호를 잘못 알려준 경우…….

 

 

작은 권리 너머 찾아야 할 것

 

국가적 차원에서 권력 구조나 근본 제도 자체의 개혁을 통한 사회 변화는 누구에게도 힘에 부치는 거창한 기획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반론과 예기하지 못한 장해에 부딪혀 이루기가 극히 힘들다. 그럴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눈앞의 과제를 잘게 나누는 방법이다. 작은 것이 큰 것보다 해결하기가 쉬울 테니까. 그런 다음 작은 것들을 한데 모으면 큰 것이 되고, 저절로 세상은 원하는 대로 바뀐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작은권리찾기운동이 그러한 환원주의를 바탕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런 효과와 가능성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권리에 대한 감수성이 확연히 달라지게 된 계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남는다. 온갖 권리를 찾아 사회 공동체의 표면에 드러내는 작업이 혹시라도 백화점 검수실의 물품 목록처럼 된 것은 아닐까. 시민이 일상의 불편에서 자신의 권리적 성격을 발견하고, 그것을 타인의 권리와 충돌하는 경계 지점에만 신경을 쓰는, 사적 영역에 한정된 작은 권리를 이해하도록 부추긴 것은 아닐까. 저마다의 자유와 권리는 그 고유의 독립한 가치보다 공동체의 목적에 지향하는 바가 포함돼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작은 권리를 사적 영역의 차원에서만 다루고 공공성과 같은 공적 영역과의 관련성에 너무 눈을 감아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작은 두려움이 있다. 작은 권리가 소시민의 분노와 시름을 한 순간 달래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구체화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것은 20주년 이후 참여연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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