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5월 2013-05-10   1692

[특집] 뿌리 깊은 냉전 구조, 한반도를 삼키다

뿌리 깊은 냉전 구조, 

한반도를 삼키다

 

 

장용훈 연합뉴스 북한부 차장

 

참여사회 2013년 5월호 (통권 198호) <특집>

 

한반도의 냉전과 ‘외교’의 역사

 

세계적 차원의 냉전 구조의 해체에도 한반도는 지난 20여 년간 여전히 냉전 구조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미 간 적대관계는 여전하고 핵문제는 그 속에서 위력을 키웠으며 남북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고 있다. 여전히 한반도 냉전의 위력은 한민족의 평화로운 삶을 가로막고 있다.

 

한반도에서 ‘관계’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외교 행위가 시작된 것은 노태우 정부로부터 출발한다. 이른바 노태우 정부의 대표적 성과인 북방정책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북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이다. 시발점은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나온 7·7선언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한과 무역 증진 및 인도적 차원의 접촉 등 6개항의 대북 제안을 발표했다. 또 북한이 미국, 일본과 관계 개선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제안이 나오고 미국 정부는 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인 1988년 12월 베이징 국제클럽에서 열린 북미대화를 필두로 북한과 34차례의 회의를 가졌다. 남북 간에는 노태우 정부 때 국무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이 열려 남북 간 대장전으로 불리는 ‘기본합의서’가 체결됐다. 또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의혹 속에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도 합의를 이뤘다. 한반도에서 대화를 통해 합의를 만들어내는 외교의 시대가 열리게 된 셈이다. 물론 합의가 제대로 이행될 국제적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남북 간 합의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두 바퀴

 

1993년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됐다. 김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이고 클린턴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이었음에도 한반도 외교는 교착 국면에 빠지고 말았다. 1992년 북한의 영변 재처리 시설 가동과 플루토늄 추출 의혹이 제기되고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에 비협조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북한 핵문제에 대한 국제적 긴장이 고조됐다. 김영삼 정부는 핵을 가진 자와는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클린턴 정부는 핵무기 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근간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을 몰아붙였다. 1994년 봄 북한의 핵개발 의혹에서 시작된 위기는 미국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론까지 제기되면서 한반도 정세를 짓눌렀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에서 외교 프로세스가 재개될 수 있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남북한은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으며 북미 양측은 지난한 양자대화를 거쳐 북한의 핵 포기와 국제사회의 경수로 발전소 제공을 골자로 하는 북미 기본합의를 체결했다. 한반도 외교의 부활이 합의를 만들어 낸 셈이다.

 

그러나 합의 체결을 주도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1994년 7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한반도 외교는 주춤했다. 김 주석에 대한 조문 문제를 계기로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북미 간 기본합의는 경수로 발전소 제공을 위한 국제적 컨소시엄 구성 등 비교적 순항했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 해결의 두 바퀴 중 한 바퀴가 어긋나면서 불협화음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위기 속에서도 진전되어온 남북관계

 

한반도 상황의 최대 전환점은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과 클린턴 대통령의 연임으로 평화 프로세스가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는 1998년 이후다. 김 대통령은 남북화해협력정책을 대북정책으로 내세웠고 남북 간 정치 관계가 풀리지 않았음에도 금강산 관광사업과 각급 교류협력정책을 통해 북한에 화해의 노크를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화해협력정책을 지지했고 한미 공조를 통해 ‘페리 프로세스’라는 대북정책을 구체화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정책의 추진은 2000년 그 결실을 맺는다. 한반도에서 분단 반세기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았고 6·15공동선언에 합의했다. 남북 간 협력에 더욱 속도를 내면서 북한에 대한 비료 및 식량 지원이 이뤄졌고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사업, 개성공단사업 등에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미국 정부도 북한과 적극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을 필두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고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했다. 북미 양측은 미사일 협상에 주력했고 타결을 앞두고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까지 추진됐지만 결국 두 가지 모두 성사시키지 못한 채 퇴임했다.

 

미국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2002년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개발 의혹이 불거졌지만 김대중 정부와 뒤이은 노무현 정부는 미국을 설득하고 북한과 협상을 이어가면서 남북관계를 조금씩 진전시켰다. 한국 정부는 한미공조를 바탕으로 중국과 협력하고 북한을 설득하면서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을 만들었고 2·13합의와 10·3합의를 도출했다. 부시 정부의 강경한 대북 입장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을 가동시켰고 경의선을 개통했으며 2007년에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10·4선언도 만들어냈다.

 

 

다시 찾아온 위기, 해법은 ‘한반도 평화’

 

하지만 한국에서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한반도는 다시 위기에 빠져들었다. 금강산 관광사업과 대북지원은 중단됐고 회담다운 회담이 열리지 못한 채 남북한의 대결이 이어졌다. 북한의 비핵화를 논의하는 6자회담은 제대로 열리지도 못했다. ‘퍼주기’라고 비난해온 대북지원사업과 협력 사업이 중단됐고,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연평도 포격도발 등을 이어가면서 국제사회에 존재감을 부각했다. 북한은 한국, 미국과의 대화 대신 중국과의 외교에 집중했으며 남북 간 교류 대신 북중 경제협력에 주력했다. 한반도는 다시 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갑작스레 사망한 뒤 북한의 정치권력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이어졌다. 이후 북한은 2012년 4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고 2013년 2월에는 제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잘못된 행위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결의로 응답했다. 북한의 거친 언사가 이어지면서 2013년 봄, 한반도 위기가 재연됐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국의 B-52, B-2 전폭기가 한반도 상공에 출현했고 북한은 핵전쟁 위협을 가했으며 결국 남북관계의 유일한 통로였던 개성공단의 기계소리는 멈추고 말았다.

 

 

20년이 넘는 지난 세월 동안 한반도는 냉온탕을 오가고 있다. 전쟁의 위기도 있었고 화해의 훈훈한 분위기도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정부의 역할이다. 노태우 정부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한국 정부는 한반도 문제 논의의 주도권을 쥐고 우리의 이익을 고려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적어도 위기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주도권을 놓고 방관하는 사이에 위기는 우리도 모르게 한반도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주도권은 우리가 한반도의 평화라는 개념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을 때에만 보장될 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과거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용훈 1994년부터 북한 및 통일 문제만을 취재해온 전문기자. 북한 김정은 후계자 내정 소식을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취재해 보도함으로써  관훈언론상, 올해의 기자상, 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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