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5월 2013-05-10   1858

[특집] 전쟁과 평화? 전쟁과 전쟁!

전쟁과 평화? 

전쟁과 전쟁!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참여사회 2013년 5월호 (통권 198호) <특집>

 

전쟁 불감증의 합리성

 

전쟁과 평화. 이는 특정 소수 집단이 역사를 정의하는 방식이다. 평균적 민초에게 삶은, ‘전쟁과 평화’가 아니라 ‘전쟁과 위기 조장·전쟁 준비 상태’로 나뉜다. 나는 이 글에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실제 전쟁’ 혹은 ‘먹고 사는 전쟁’이 국가 간 전쟁의 공포를 어떻게 ‘진압’ 하는지를 세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의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전쟁의 신호탄이었다. 우리의 이른바 ‘87년 체제’도 절차적 민주화의 진전이라기보다는, 한국 경제가 글로벌 자본주의로 급속히 편입되는 과정의 다른 표현이었다. 국내의 빈부 격차는 심화되고 삼성, 박찬호, 싸이 같은 ‘일부 한국’이 한국을 대표하는 체제, 과거 청산 같은 민주화 작업은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눈가림하는 데 본의 아니게(?) 유용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신자유주의 좌파’로 불렸던 상황은 모순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이었다.

 

살인적인 경쟁과 양극화 체제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전쟁을 새롭게 실감하고 정의하게 되었다. 전후 세대에게 전쟁은 겪어본 바 없는 일이고, 더구나 현대전에서는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는 터라, 일단 ‘평화 시’에 먹고 사는 고통이 더 큰 전쟁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최근 한국 사회의 전쟁 불감증을 보도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국가 간 전쟁에는 불감증일지 모르지만 일상의 전쟁에는 신경쇠약 직전이다.

 

개인적으로 내게 평화는 슬픔의 시간차가 없는 이별, 즉 지구 동시 멸망이기 때문에 전쟁이 나더라도 고통의 시간이 짧기를 바랄 뿐, 걱정이 없다. 그래서 나는 북미 간 대립과 상호 협박보다, 민주당의 차별금지법 발의 철회나 같은 당 민홍철 의원이 군대 내 동성 성행위를 범죄로 확정하는 군형법을 발의하는 현실에, ‘더 큰 전쟁’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내게도 “전쟁 나면 회사 안 가니 좋다”, “수능도 안 보겠지”라는 시민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반북이나 반미에 대한 반응도 별로 없다. 마치 전쟁을 고달픈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남편이 돌아오자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푸코와 클라우제비츠의 대립은 푸코의 KO승이다. 야전 출신의 출중한 지도자 클라우제비츠는, 평생 총 한번 안 잡아 봤을 지식인에게 전쟁(개념)에서 졌다. 주지하다시피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전통적 견해를 견지했다. 즉, 클라우제비츠에게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 진정한 정치적 도구,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추구이다. 푸코는 이를 간단히 뒤집었다. 푸코에게는 정치가 전쟁의 연장이다. 한 마디로, 일상이 전쟁이라는 푸코의 개념은 ‘전쟁<정치’이고, 현실을 잘 모르는 ‘현실정치’ 세력이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은 ‘전쟁>정치’라고 보는 것이다. 시비를 가릴 필요가 없다. 이미 전쟁 불감증으로 진실은 증명되었다.

여성은 실체적 범주가 아니라 정치적 개념이다. 이 글에서 여성은 양성 중 하나가 아니라 건강 약자, 노인, 장애인 등을 아우르는 타자의 상징이다. 위 ‘여성’, 즉 ‘비非남성’들이 ‘평화 시’ 겪는 (성)폭력, 감금 상태의 성매매, 인신매매, 가정 폭력의 현실을 고려하면 ‘여성’은 기존의 전쟁 개념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전복 세력일 것이다. 특히 가정 폭력은 살과 피가 튀는 가장 오래된 그리고 영원히 멈추지 않을 테러이다.

 

여성 입장에서 전쟁과 평화의 구분에 의문을 제기한 대표적인 텍스트는 독일 영화 <독일, 창백한 어머니>다.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작이자 각종 예술 영화제의 단골 상영작으로 영화사적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헬마 잔더스-브람스 감독은 2차 대전 당시 자신과 어머니에게 일어났던 일을 1980년에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면, 유적지만이 아니라 가부장제도 파괴한다. 아내는 전쟁 동안 남편의 폭력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 피난길에 군인들에게 윤간을 당하지만 피해자를 비난하는 커뮤니티가 없고 딸이 위로해주기 때문에, ‘평화 시’ 성폭행 경험과 다르다. 보통 때 성폭력은 그 자체보다도 이에 대한 남성 중심적인 해석이 더 큰 폭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비극은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이 집에 모이자마자 시작된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남편이 돌아오자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다”이다. 영화에서 ‘집’은 가부장제를 상징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거리는 ‘해방구’다. 물론 전쟁이 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는 세상 모든 약자의 입장에서 전쟁과 평화의 구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 경찰과 군인은 엉뚱한 일을 한다

 

한국 남성의 술 문화는 유별나다. 일상과 술 문화는 거의 동일한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는 음주 문화에 지나치게 관대하다. 이로 인한 타인에 대한 무례나 사회적 물의, 범죄 행위에는 더욱 관대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관대함’의 대표적 피해 영역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술만 마시면 아내를 구타하든, 성폭력을 하든, 공공장소에서 용변을 보든 정상참작情狀參酌이 된다. 심지어 정상참작이라는 단어 자체에 술을 붓는다는 뜻의 ‘작酌’이 포함되어있다.

 

얼마 전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었다. 일부(?) 경찰은 과중한 성매매 단속에 고생하면서도 여론, 남성 손님, 판매 여성, 업주로부터 각각 다른 내용의 비난과 의심에 시달린다. “선진국은 야간에 할 일이 없다. 야간에 취객이 적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취객에 시달리지 않으니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생긴다”는 경찰의 하소연은 어디서 들어본 듯하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시위 진압에 병력이 동원되면서 연쇄 살인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를 눈앞에서 놓치는 장면의 기시감이다.

 

위 두 사례는 남성의 문제 때문에 남성이 남성을 단속하느라, 국가 권력(‘남성’)이 국민(‘여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한국사에서 남성과 국가는 보호자 역할을 한 적이 없다. 여성을 지키기는커녕 외세에 협상물로 내세워왔다. 고려시대 조공이었던 ‘환향녀’, 현대사의 ‘군 위안부’, 기생 관광, 기지촌 성매매가 모두 그러한 역사이다.

 

그런데 한국의 남성 문화는 보호자 역할을 못한 것을 미안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에게 화풀이를 하고 위로를 요구한다. 이를 ‘식민지 남성성’이라고 하는데, 이상의 <날개>에서부터 최근 김기덕의 영화까지 근현대사 전반을 특징짓는 사회 문화적 현상이다. 

 

경찰이 약한 국민을 괴롭히는 못된 국민으로부터 보호하는 내부 치안을, 군대가 국민을 위협하는 외국으로부터 안보를 책임진다는 이론은 서구적이며 허구적이다. 몇 년간 격렬했던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에서 경찰은 영하의 날씨에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았다. 촛불시위, 대추리, 매향리, 강정마을……. 우리나라 경찰은 누구를 보호하려고 누구와 전쟁을 하고 있는가. 평화 시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과 국가 안보를 담당한다는 군대의 역할 분담의 붕괴는, 전쟁과 평화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정희진 여성학, 평화학 연구자. 다多학제적 관점의 공부와 글쓰기를 지향한다. 기존의 논쟁 구도를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데 관심이 있다. 선한 사람 혹은 강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기보다 약한 사람임에 감사한다. 불안정한 사람의 마음을 사랑하며 이것이 평화정치학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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