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4월 1999-04-01   716

시민단체가 여의도행 티켓 예매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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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민운동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경실련이 몇달째 흔들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경실련은 87년 6월항쟁 이후 넓어져 가는 시민사회라는 공간에 제일 먼저 눈을 돌려 시민운동시대의 문을 열었다. 금융실명제의 깃발을 내걸고, 토지공개념이란 화두를 던지고, 재벌개혁을 외치던 경실련이 새로운 운동의 지평을 넓혔음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언론이 경실련의 흔들림을 크게 보도하는 것은 경실련, 나아가서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운동은 개혁을 목표로 한다. 이른바 제3섹터로 불리면서 시민운동은 개혁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 따라서 시민운동의 발언권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 김영삼정부에서 시민운동의 존재를 인정하더니, 국민의 정부에서는 시민단체가 국정운용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중요한 사회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경실련사태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은 여러 가지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민단체와 정치의 관계이다. 이른바 ‘대필과 표절’ 사건을 계기로 불거져 나온 사무총장 연임 반대와 간사 해임 등이 겉으로 드러난 경실련사태의 내용이다. 그런데 경실련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치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필상 교수(고려대)가 경제정의연구소 소장 사표를 내면서 경실련이 지나치게 정치로 기울어져 있음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시민운동이 정치적임은 크게 비난할 일이 못 된다.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나라에서 시민운동의 정책 지향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정치적 영향력의 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지적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시민 참여가 저조한 상황에서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치적 성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정치성에 휘말리면 도덕적 타격

시민운동이 처음부터 정치적 지향성이 강했던 것은 아니다. 시민운동의 정치적 성격이 강해진 것은 김영삼정부가 출범한 다음부터였다. 경실련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이 정부와 정치권에 ‘조직의 파견’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스카우트됐다. 이들은 ‘참여 속의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시민운동의 성과를 등에 업고 개인적인 정치 진출을 이룬 것이다.

그 뒤 96년의 4·11 총선에서 시민운동의 일부가 정치권 진출을 시도하였다. 6·27 지방선거 직후 야당이 분열되는 것에 실망한 시민운동 일부에서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정치세력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경실련의 중심축이었던 서경석 목사와 일부 세력이 새로운 정치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시기상조론이 들어맞았지만 정치세력화 주장이 타당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민운동이 정치세력화할 필요는 없다.

시민운동가들의 정계 진출이 개인 자격으로 이뤄진 것이었기 때문에 시민운동이 약화되거나 위축될 정도의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민운동 역량의 손실과 시민운동의 이미지 손상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시민운동이 정치권 진입을 꾀하는 사람들의 발판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비판과 더불어 시민운동 자체의 순수성을 의심받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은 국민의 정부에 들어와서 더욱 커졌다. 김영삼정부가 국정 운영의 실패로 말미암아 힘을 잃어가면서 이에 비례하여 시민운동의 힘은 점점 커져갔다. IMF체제가 들어선 뒤 정치에 실망한 국민의 시민운동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들어선 국민의 정부는 시민단체를 개혁 추진의 파트너로 삼은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로 시민운동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일부는 ‘조직의 파견’ 형식으로, 일부는 ‘개인 자격’으로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 대거 새 정부에 합류했다. 밀월관계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김대중정부와 가까워진 시민운동가와 시민단체들이 나타났다. 순수성을 의심받기는 하지만 개혁이 정부의 힘만으로는 안 되므로 민간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새로운 시민운동단체가 나타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시대에는 시민단체가 새로운 관변단체가 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물론 새 정부의 개혁에 대한 시민운동의 지지의 목소리만 높은 것이 아니라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그러나 정권교체 이후 시민운동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시민운동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평가에서 드러나듯이 시민단체의 회원은 몇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적지 않다. 시민운동이 갖는 이러한 영향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 언론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정부도 못하고 언론도 못하는 일을 시민운동이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힘은 바로 도덕성과 자기희생이다. 그러나 시민운동을 통해 ‘출세’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그리고 시민단체가 정치성 시비에 휘말린다면 시민운동을 지탱해왔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국가를 이끌어 온 것은 제1섹터와 제2섹터였다. 공적(Public) 영역이라 불리는 제1섹터는 권력(정부)의 몫이었다. 제2섹터는 사적(Private) 영역이라 불렸지만 실제로는 돈(기업, 자본)의 영역이었다. 사적 영역 가운데 돈과 무관한 민간(Civil) 영역이 바로 제3섹터이다. 앞으로는 사회를 움직여나가는 힘이 도덕성과 자기헌신성을 바탕으로 한 공익적 영역인 제3섹터, 즉 시민사회 영역에서 나타날 것이다.

점차 영향력 확대되는 제3섹터, 시민사회

예컨대 집권당과 야당의 이해 다툼으로 비틀거리는 정치개혁을 풀어나갈 실마리는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여야 모두 자기들 생각이 국민의 뜻이라고 강변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국민 이익이 오히려 희생되어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국민 이익보다는 특정한 정파나 특정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정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경제 구조조정이 재벌과 정부, 기업과 금융기관 사이의 밀고당기기로 비쳐지는 것도 시민사회를 무시한 채 제1, 2섹터 사이에서만 구조조정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이 사회발전의 주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자율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 자율적인 힘은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한 시민단체의 도덕성과 자기희생에서 나온다. 자율적인 시민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시민단체들이 발전해야 한다. 시민단체들의 발전은 회원의 수가 늘어나고 사회에서 갖는 발언권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민단체의 운영이 투명하고 개방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단체가 정치성 논의에 휘말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1년동안 김대중정부는 경제위기의 단기적 극복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포용정책이나 외교정책 등에 있어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실업대책과 더불어 정치분야의 개혁은 실패했다. 위기 관리에는 성공했지만 개혁입법 작업 등 사회체계를 민주화시키려는 본질적인 작업은 거의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에 치러질 16대 총선을 앞두고 신진세력의 충원이라는 형식으로 시민단체의 활동가 일부를 개별적으로 뽑아가려는 것은 건전한 시민운동의 발전에도 또 개혁의 추진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민단체가 개혁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정부의 품안으로 뛰어들어가거나 정치세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기득권 세력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함으로써 개혁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이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임승차자(Free-rider)로 남아 있는 시민이 시민운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1년에 단돈 1,000원이라도 시민단체를 후원하고, 단 하루라도 좋으니 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시민운동을 지켜주고 개혁을 성공시키는 원동력이며, 우리의 21세기를 희망의 시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손혁재 정치학 박사·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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