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8월 2002-08-10   834

평화의 지평 위에서 통일을 꿈꾸다

이김현숙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상임대표


이 난을 맡고 나서 네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남자였다. ‘왜 남자만 하냐’고 누가 따진 것도 아닌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인데, 이래도 되나?’ 장윤선 편집장도 연속적으로 남성만 출연하는 게 은근히 걸렸던 것 같다. ‘이번엔 여성을 만나는 게 어떻겠어요?’ 장 편집장의 조심스런 제의가 있었고, 나는 흔쾌히 뜻을 같이 했다. 고민이 시작됐다. 그러나 여성하면 여성운동을 연상하는 고정관념에서는 벗어나고 싶었다. 적어도 내게 여성운동은 부문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 편집장은 내게 한 가지를 더 주문했다. 예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이번에 낼 책이 8월호거든요’라고 넌지시 자신의 의중을 담아 보냈다.

8월이라…. 많은 이들에겐 불볕더위와 여름철 휴가가 연상되겠지만, 내게 8월은 해방과 분단이라는 형용모순이 한꺼번에 닥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달이다(사실 아직도 총각인 탓에 사람이 붐비는 7, 8월을 피해 9월 초에 휴가를 떠난다. 그러니 내가 ‘8월=여름휴가’를 연상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평화란 나와 다른 사람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상태

‘기획망명’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 탈북자(‘북한이탈주민’이라는 정식 용어의 줄임말)들의 잇단 재중 외교공관 진입과 그에 뒤이은 한국행, 6·29 서해교전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동안 뒤로 밀쳐졌던 분단의 아픔을 극적으로 눈앞에 들이밀었다. 김대중 대통령 두 아들의 비리 등 내치의 실패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냉전시대를 방불케하는 일방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멈칫거림으로 이미 빛이 상당히 바랜 대북 화해협력정책은 또 한번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번엔 평화와 통일에 대해 공부하는 게 좋겠다’고. 단박에 이김현숙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상임대표가 떠올랐다. 여성, 평화, 통일을 한몸에 담고 사는 열혈(?) 아주머니.

어쩌면 아직 그를 잘 모르는 이들이 꽤 될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가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든 게 나이 쉰에 이른 1997년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평화나 통일, 여성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부터라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겨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사회에서 말의 바른 뜻에서 평화와 통일을 운동 차원에서 다룬 곳에선 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인터뷰는 7월 11일 저녁 안국동 참여연대 2층 철학마당 느티나무에서 1시간 40분 남짓 이뤄졌는데, 질문과 답변의 대부분은 ‘평화’와 관련한 것이었다. ‘분단에 가로막혀 먼 수평선 너머에서 어른거리기만 하는 평화를, 가슴의 멍울처럼 속을 답답하게 하는 평화부재의 현실을 생각하자. 해방과 분단의 8월에 평화의 지평선을 꿈꿔보자.’ 인터뷰는 그런 생각 속에 이뤄졌다.

평화(운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제2바티칸 공회에선 평화를 ‘정의의 적극적 구현’이라고 했던데.

“누구나 다 아는 것 같은 걸 물으면 얼마나 답하기 어려운지 잘 알죠?(모두 웃음). 전문가들은 전쟁이나 폭력이 부재한 상태를 소극적 평화라 말하고 사회정의가 구현된 상태를 적극적 평화라 말한다. 어떤 서양사람은 ‘평화란 나와 다른 사람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난 그게 참 좋다. 부부든 국가든 관계를 맺으면 ‘다른 것’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관용이 지배적 덕목이 되는 상태가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정의구현은 평화의 기본요건이고 거기에 관용의 덕목이 결합돼야 한다.”

그동안 평화운동을 하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면?

“이 대답을 하려면 먼저 한국사회에서 제가 관심갖고 있는 평화의 주된 이슈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전쟁을 막는 일이라 믿는다. 둘째는 남북화해와 통합을 이루는 것이고. 세 번째로 중요한 게 군사주의 문화의 해체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평화적 분쟁 해결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일이다.

나는 이런 관심사를 품고 일하고 있다. 그동안 평화운동을 하며 한국사회 전반에 이런 평화이슈들을 해결하려는 적극적 열망이 있는가, 그런 회의가 들었다. 평화운동이 되려면 많은 사람이 평화에 대한 욕구와 의지를 지녀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앞에 말한 사안들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평화에 대한 욕망이 있기는 한 것인지도 궁금하다. 그건 아마도 너무 오랜 세월, 식민지, 전쟁, 남북대치, 군사정부 등 갈등상황 아래서 살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

평화를 생각할 때 우리보다 나은 사회와 비교해야 할텐데, 많은 사람들은 그보단 어려웠던 과거와 비교하며 사는 것 같다. 사람들이 ‘전보다 나아졌잖아? 먹고 살만은 하잖아? 자동차도 있고’하며 현재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더 나은 것을 꿈꾸면 일쑤로 정권의 탄압을 받아야 했던 현대사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평화에 대한 욕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현실인 것 같다.

또 하나 역사적 체험에 비춰보면 한국사회에서 ‘평화’란 말은 이데올로기와 직결되어 있다. ‘평화’란 사회주의에서 많이 회자되어온 개념이다. 따라서 첨예한 군사적 대치 속의 분단 상황에서 ‘평화’란 말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연상시키곤 한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치 속에서 ‘평화’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들에게 평화에 대한 의지를 갖게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의 일상에 분단 반세기의 일상화한 폭력이 짙게 배어 있는 것 같다. ‘누구누구는 총살시켜야 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둥, 말글살이가 거친 것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속내를 이해는 한다. 그러나 가끔 절망에 빠지게 되고, 이걸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고민이 깊다. 솔직히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면서 꼼꼼히 우리사회의 폭력성과 군사주의적 코드들을 해독해내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화(운동)의 주된 이슈로 통일을 거론했는데, 통일을 꼭 해야 하나? 전에는 같은 민족이니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대적이었는데, 요즘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같은 민족이라고 꼭 통일을 해야 하나? 높은 수준의 평화공존도 괜찮은 것 아닌가?’ 라고 반문하는 이들이 많다. 이건 북한(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부담을 짊어지지 않겠다는 태도와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은데.

“사실 무슨 일이 있어도 통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나한테 선택하라면 통일을 택하겠다. 어쨌든 ‘통일은 꼭 해야 하나’라는 질문은 우리 주변의 통일지상주의, 즉 관습적 구호와 믿음에 대해 다시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통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사실 국민이 선택할 문제다. 그게 어느 시점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통일은 국민의 의사를 물어 결정해야 한다. 만약 국민들이 통일보다 고도의 평화공존체제가 더 좋겠다고 선택한다면 그리로 가야 한다. 누구도 강제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선택이라는 좋은 말 속에는 위험요소 또한 굉장히 많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선 상당히 높은 의식 수준과 객관적 판단, 충분한 정보, 균형감 있는 사고훈련 등이 잘 갖춰져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막연하게 통일 통일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여러 시나리오를 세워놓고 어떤 게 민족의 이익, 공동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가장 유익한 것인지 충분히 검토하고 고민하며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통일 그 자체보다는 ‘어떤 통일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식민지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평화운동 차원에서 통일이 필요한 이유는 뭔가?

“같은 민족이지만 체제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평화공존의) 장치가 있어도 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국제질서 또한 아주 가변적이기 때문에 평화공존 상태에서 분쟁을 영구적으로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가장 근원적으로는 남북간 분쟁과 갈등 나아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통일이 되면 상호경쟁과 비방, 군비경쟁에서 벗어날 것이고 분단관리 비용도 줄어들 것이다. 남북의 민족자원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국익도 확대될 것이다. 이 급속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군사적으로 분쟁가능성을 안고 있으면 둘 다 세계화 흐름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세계화 속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도 통합/통일이 절실하다. 쉽진 않겠지만, 남북이 서로의 자산을 보존하며 발전시키면 좋을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통합됨으로써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화, 정의, 평등, 평화, 복지 등의 덕목을 더 잘 구현하고 꽃피울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질 수 있다. 우리의 오랜 고통인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공포, 이에 따른 국론분열과 혼란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때라야 우리는 자유의 참맛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정상회담 이후 각종 남북교류현장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등 평화운동가이면서도 일반인에게는 통일운동가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그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양에만 두 번 가는 등 모두 여덟 차례 방북 경험이 있다. 이 정도면 북한 전문가로 자처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스스로는 통일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평화운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평화운동의 하나로서 통일운동을 한다. 통일이 된다고 평화가 자동적으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평화운동과 통일운동의 관계는 전문가들도 명쾌하게 정리해내지 못하는 상당히 까다로운 쟁점이다. 평화운동은 물론 통일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둘 사이의 관계를 잘 정리하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통일운동은 평화운동의 구성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운동이 평화운동의 하나라는 것은 분단에서 비롯된 결과들이 반평화적이기 때문이다. 분단으로 인한 반평화적 폐해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고 사람들의 자유로운 삶을 제약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이 하나니까 통일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화적이고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해 통일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민족이 하나여도 분가해서 살 수 있다.

분단에서 비롯된 반평화적 폐해로 우선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꼽을 수 있다. 무엇인가 눈치보며 사는 비주체적 상황이 답답하고 때로 공포스럽다. 많은 이들은 무슨 얘기를 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하는 식으로 자기검열을 한다. 분단상황에서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누릴 길이 없다. 이게 얼마나 한 공동체의 창의력을 제약하는지 가늠하기조차 곤란하다.

그리고 외국군대의 주둔과 이로 인한 범죄와 주민들의 피해도 분단상황이 초래하는 심각한 폐해다. 최근 의정부 여중생 사고를 보자. …주민이 죽임을 당해도 정부가 보호를 못하고 있다. 불평등한 소파규정 때문에…, 세상에…, 이들은 누구에게 안전과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아야 하는 것인가? (이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고 톤도 높아졌다. 조금 지나자 그는 손으로 탁자를 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다 분단 때문인데, 우리는 이런 현실을 잘 모르고 살아왔다. 우리가 피해를 입고도 늘 미국의 눈치를 보고 겁을 먹지 않나? 이런 식민지적 상황이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여중생이 죽었는데, 미군에 의해 죽었는데, 정부는 나몰라라야. 시민들이 나서서 항의하고 요구하면 마지못해 움직이고, 한국정부는 도대체 누굴 위한 정부인지…미국의 눈치를 보아야하는 정부라면 이게 식민지적 상황이 아니고 뭔가. 탱크가 돌아다니는 길에 인도 하나 없는 게 무슨 나라인가. 대통령과 총리, 법무부장관, 군수, 지방의회 의원들은 군기지 주민의 안전과 생명을 염려하기나 하는 사람들인지, 세금 거두어 예산은 도대체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르겠다.

미공군폭격기지가 있는 매향리에선 임산부가 가장 먼저 하는 산후준비가 폭격기 소음에서 애기를 보호하기 위해 목화솜과 우황청심환을 챙겨놓는 거다. 사람들은 전쟁이 반세기 전에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아직도 전쟁 상황에 있다. 바로 이런 폐혜를 없애려면 통일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외국군대도 철수시켜야 하고.

영어에 oxymoron(모순어법)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군대만 부강하면 국가의 안보가 지켜진다고 생각하는데, 안보를 위해 와 있다는 군대가 주민의 안보를 헤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이 모순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군 장갑차의 안보를 위해 그들이 지켜야할 여중생의 생명이 죽임을 당하고 미군에 대한 보호만 있고 주민에 대한 보호규정은 없는 불평등한 소파규정을 따라야 하는 현실은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분단의 가장 큰 폐해의 하나다.

이런 일 때문에라도 통일을 해야 한다. 그뿐인가. 군사비로 들어가는 예산이 어마어마하다. 분단은 복지비나 생산비로 쓸 수 있는 예산을 갉아 먹는다. 연평도 서해교전이 나자 이걸 군사문제로만 몰아가는데, 그건 군사문제이자 어민들의 생존권 문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분단은 주민들의 경제적 안보도 침식하는 폐해를 낳고 있다.

오랜 세월 통일운동을 해온 분들을 만나며 느낀 점은?

“여성으로서, 할 얘기가 많다. 하지만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일생을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며 통일운동에 헌신해온 그분들께 기본적인 존경심이 있다. 아직은 배울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거듭해서 답변을 요구하자)굳이 말하라면, 통일운동 전반에 아직도 가부장적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갖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평생을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투쟁 속에서 살아오셔서 그런지, 합리적 토론과 개방적 자세가 부족하다는 느낌도 있다. 또한 주장이 발전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다는 느낌도 있다.”

슬픔의 힘으로 자라는 꽃, 그 이름 평화

그는 늘 바쁘게 산다. 그래서 인터뷰 들머리에 몸풀기 삼아 ‘요즘은 무슨 일로 바쁘시냐’고 물었더니, 답변이 정말 진지했다. “바쁜 척하는데, 그에 비해 생산성이 너무 낮아서 무능력함에 좌절하느라 바뻐요.” 그리곤 엷은 웃음을 흘린다. 아마도 세상이 반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낙담이리라. 짓궂게 ‘세상이 밉지 않냐’고 물었더니 이번에도 진지하다. “세상을 미워할 나이는 아니에요. 세상을 미워할 수는 없고, 세상은 정말 아름답고 사랑하고 싶은데, 가끔 너무 힘들어요.” 그래도 그는 사람들이 밉지 않단다. 오랜 세월 반공이데올로기에 치이고, 아직도 분단상황에 억눌린 사람들이 평화를 생각할 겨를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한단다. 그래서 다른 문제론 섭섭할 때가 많지만, 평화 문제에선 아직은 섭섭해하지 않기로 했단다.

그는 중학생 때 유관순 영화를 보다가 일본순사가 고문하는 장면에서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뒤론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보지 못한다고 했다. 결혼해서는 어느 날 아침 아무 잘못도 없는 남편을 권총 찬 군인들이 느닷없이 안방까지 들이닥쳐 끌어가는 것을 보고 또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그가 평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런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근원적 공포를 털어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렇게 예민한 감수성으로, 이런 험한 세상을, 저렇게 온화한 낯빛을 일구며 살아낼 수 있다니….

그는 젊어서부터 줄곧 사회운동에 관여해왔지만, 본격적으로 ‘운동권 인사’가 된 것은 나이 쉰에 이르러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의 창립과 그 이후 활동에 중심적 구실을 하면서부터다. “젊어선 겁이 많았어요. 그래서 나이 쉰이 되면 겁이 없을 거라 생각했죠. 한데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또 제가 완벽주의적인 경향이 있어요. 충분히 상황을 이해한 뒤에 움직이겠다는 거였죠.”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다짐대로 살아가고 있다. 꼭 나이 쉰이던 1997년부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니까. 그는 자신을 ‘이상주의자’라고 했지만, 나는 그가 현실을 폄하하는 이상주의적 경향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사람들의 다른 의견을, 그것이 아무리 하찮고 부질없는 것이라 해도, 엷은 웃음으로 맞이한다. 아마도 그런 태도는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에서 몇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진행하고 있는 ‘갈등해소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바, ‘평화능력’이 몸 안에 충만하기 때문이리라.

나이를 먹는다는 건 슬픔이 많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그는 슬픔의 우물을 길어 아름다운 꽃을 피울 꿈을 지닌 사람처럼 보였다. 슬픔의 힘으로 자라는 꽃이라…, 그꽃에 이름을 지어준다면, ‘평화’라고 해야겠다.

이제훈 본지 편집위원 ·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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