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8월 2002-08-10   658

어민에게 교전책임 묻다니… ‘우리는 억울하다’

르포-연평도를 가다


그물에 걸린 꽃게 중 절반은 이미 썩어버렸다. 게 따기를 마치고 버린 그물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문드러진 꽃게가 잔뜩 매달려 있다. 갈매기만 신이 났다. 답답한 어민들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버려진 그물 주변에 새까맣게 모여든 갈매기들은 진수성찬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기껏 고생해서 갈매기만 좋은 일 시켰다며 울화가 치민 한 어부가 꽃게를 뜯느라 정신이 없는 갈매기 한 마리를 작대기로 후려친다. 갈매기는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놀란 갈매기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끼륵거린다. 수백 마리의 갈매기 소리가 하늘을 찢고, 푸드덕거리는 날갯짓에 볼까지 서늘하다. 하지만 갈매기를 후려쳤던 어부나 게 따기를 하는 아낙들 누구 하나 흔들림이 없다. 유래 없는 꽃게 흉년으로 생계가 어려워진데다 젊은 목숨들이 피 흘리며 실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연평도 주민들의 가슴은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위태로운 섬 연평도

섬 곳곳에서 뒤늦게 걷어온 그물에서 게를 따내고 있지만 풍요로워야 할 어심은 어둡기만 하다. 주민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없다. 사실 지금 연평도에서 꽃게를 따고 있는 것도 불법이다. 6월 29일 발생한 교전으로 출항이 금지되고 뒤이어 태풍 ‘라마순’이 서해를 강타하면서 어선의 발을 묶어버려 6월까지 허가된 조업기간은 끝나버렸다. 총성도, 광폭한 태풍도 자취를 감춘 뒤이지만, 어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있다.

“도무지 신이 나지 않아요. 예전 이맘때면 섬 전체가 활기에 차 있었는데….”

한 아주머니는 꽃게 흉년에 서해교전까지 터진 올해 섬의 분위기는 마치 초상집 같다며 맥빠진 손놀림으로 꽃게를 따낸다.

99년에 이어 올해 또다시 남북간에 교전이 발생한 연평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나 마찬가지다. 6·25 직후 연합군과 북한이 서해 경계에 대해 명확한 합의를 보지 못한 이후 미군이 일방적으로 북방한계선(NLL)을 그어놨지만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연이은 어선나포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정권은 68년 어로저지선(어로한계선)을 발표했지만 NLL 근처의 황금어장은 남북한 어민 누구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결국 연평도 연해에서 남북한 어선의 불안한 동거는 계속되어 왔고, 이는 언제라도 양쪽 간에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연평도에 들어가기 위해 당섬 선착장에 내리면 높이 3m 정도의 기념비를 마주하게 된다.

서해교전 승전 기념탑. 99년 올해와 같은 장소에서 벌어졌던 서해교전의 전과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놓은 탑이다. 군과 정부, 언론이 당시 승리에만 취해 있지 않고 교전 원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했어도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었을까?

포성이 연평도 어심을 갈라놓다

6월 29일 인근 해역을 흔들었던 포성은 이 조그만 섬을 두 동강 내버렸다. 교전발생 직후 극단으로 치닫던 국민감정은 이후 연평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과 교전발생 원인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어민들의 월선(越線) 사실을 제보함으로써 국방부의 발표를 수정하게 했던 지역주민들은 “쓸데없는 말을 흘려 연평도를 흐려놓는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어민들이 교전 당일 어로한계선을 넘어 조업했다는 사실을 언론사에 제보한 이후 주변으로부터 ‘왜 안에서 해결할 일을 밖에다 말해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는 눈총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어민들의 월선 사실에 대한 최초 제보자 신남석 씨(52세)는 “사실과는 동떨어진 국방부의 발표와 이를 받아적기에 바쁜 언론을 보고 사태의 진실을 알려야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사건 당일 조업을 나갔던 꽃게잡이 어선 ㅂ호 선장 김아무개 씨 역시 “꽃게잡이 허용기간의 만료일이 다가오면서 조급해진 어선들은 29일 일제히 월선조업을 했고, 이로 인해 북한 경비정이 위협을 느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 연평도 어민들은 월선조업에 대해 쉬쉬하는 형편이고 월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연평면 남부리 이장 문배설 씨(60세)는 “어로한계선 근처에 설치한 틀이 해류에 의해 북쪽으로 밀려 한계선을 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월선을 하지는 않았다”며 “연평도에 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며 살아왔는데 교전 책임을 연평도민에게 돌리는 것은 너무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래도 포기 못할 만선의 꿈

연평도 선착장을 가득 메웠던 고깃배들이 동이 트자 하나둘 물질을 해 수평선 너머로 나선다. 6월로 봄 꽃게잡이는 마무리하고, 9월에 가을 꽃게잡이가 다시 시작될 때까지 어민들은 병어와 광어 낚시로 여름 한철을 난다. 어선에 휘발유를 넣고 낚시도구를 손질하는 어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어선과 통제소 사이에 쉴새없이 무전이 오간다.

“아∼ 그럼 만선하십쇼!”

만선을 기원하는 통제소의 무전이 떨어진 뒤에야 어선은 거친 숨소리를 몰아쉬며 선착장을 빠져나간다. 꽃게철이라면 동이 트는 동시에 어선들이 일제히 출항하지만 저마다 잡는 어종이 다른 지금은 출어 시간도 제각각이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선착장에서 단잠에 빠져 있는 배가 여러 척이다. 일부러 출어 시간을 늦춘 경우도 있고, 간밤에 선장과 선원들이 어울려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인 탓에 동튼 줄도 모르고 코를 골고 있는 배들도 있다.

어제까지 어로한계선 남쪽에 있는 꽃게 투망을 다 걷어내고, 이제 병어낚시로 돌아서 느지막이 선착장에 나타난 김 선장(38세)의 주위로 선원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뱃사람 특유의 거친 말투로 피우는 이야기꽃은 단연 서해교전에 집중된다.

“제길, 총질 난 이후로 해군들이 어민들 대하는 게 확 달라졌더구먼. 박스(조업구역) 경계선 근처에만 가도 욕부터 나와.”

“이해해야지. 자기들 눈앞에서 동료가 죽어나가는 것을 봤으니 맴이 오죽하겄어? 당분간은 안 건드리는 게 좋을걸?”

“그래도 지금은 나은 거지. 예전 군사정권 때는 월선하다 걸리면 어선 쪽에다 총부리 딱 들이대고, 대장이 우리 배로 넘어와서 이름이니 나이니 적어갔었지.”

“되놈(중국)들은 더해. 그놈들은 지들 구역에 침범하면 권총 손잡이로 대갈통부터 갈기고 시작했어.”

“하여간 이게 뭐여. 어쨌든 적색선(어로한계선) 이북에 있는 틀들은 걷어와야 될 것 아녀. 단속을 하려거든 이런 일 터지기 전에 했어야지. 꽃게야 다 썩어 문드러졌겠지만 틀이라도 건져와야지.”

“어민들도 문제가 있지. 들어오면 ‘오늘 적색선에서 6마일을 더 나갔네. 7마일을 더 나갔네’ 자랑하고 다니던 놈들이 총질 일어나고 보니깐 입 사악 닦고….”

뱃사람들 이야기에도 ‘왕년’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한창 고기 잘 잡힐 때는 담을 데가 없어서 선원실까지 꽉꽉 채워 담기도 했는데, 지금은 물고기들이 씨가 말라버렸어.”

“돈 뭉치 들고 청기와집 색시들에게 던져놓고는 있는 대로 먹고 마시고 얼마가 빠져나가는지 신경도 안 썼는데. 계집 치마폭에 쑤셔박은 돈이 수억은 될걸?”

“그때 돈 좀 모아놨어야 하는데 왜 뱃놈들은 그게 안 되는지 몰라.”

공허한 웃음을 뿌리며 선원들은 하나둘 배로 돌아가 출어 준비를 한다.

연평도는 60년대 후반까지도 ‘조기섬’으로 유명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중 연평도에 배를 대고 나뭇가지를 꺾어 개펄에 꽂아두었더니 물이 빠진 뒤 가지마다 조기가 걸려 있더라는 설화가 전해질 정도다. 이것이 바로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초라고 한다.

해방 직후 해마다 전국의 고깃배들을 끌어모아 조기파시를 열던 연평도였지만 68년 어로한계선이 선포되면서 조기섬의 명성은 늙은 어부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80년대부터 꽃게가 잡히면서 섬사람들은 생계를 꽃게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풍어가 계속되던 연평도 꽃게잡이는 올해 수확량이 갑자기 줄었다. 어획량이 준 것을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많지만 어민들은 수온 변화와 어장의 황폐화를 주요 요인으로 든다.

꽃게잡이배 선장 김아무개 씨(46세)는 “현재 연평어장은 수거되지 않은 어망들로 황폐해진 상태다. 바다가 죽고 꽃게가 어부들의 손길을 피해 북으로 올라가니, 어선들이 북으로 뱃머리를 향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업구역 이북에 설치된 어망만도 어림잡아 800여 개가 된다. 이것들을 수거하지 않는다면 바다가 심하게 오염될 것이고, 개당 700만 원이 넘는 틀을 수거하지 못한다면 어민들도 피해가 심각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농촌의 폐비닐처럼 섬 곳곳에 내팽개쳐진 그물도 생활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마을 뒤편에 각종 쓰레기들과 함께 버려진 그물 주변에서는 악취가 진동하고 파리, 모기 등 해충이 득시글거린다. 연평도에서는 한때 폐그물을 가져와야만 새 그물을 파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어민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평화보다 생계가 우선

연평도에서 북녘땅까지는 직선거리로 14㎞ 남짓. 그 사이에는 역시 북한 영토인 갈도 등 몇 개의 섬이 놓여 있다. 맑은 날 연평도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조그만 섬들은 물론 북녘의 옹진반도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보인다. 때문에 연평도에는 유난히 실향민들이 많이 흘러 들어왔다.

황해도 출신으로 인민군에게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김진화 할머니(68세)는 분단 때문에 지금도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 현실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다.

“젊은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 화를 당해야 했겠어. 애꿎은 목숨 죽게 했으면 다시는 총질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지. 사람들이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봐 어떻게든 시끄러운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언론이나 평화단체에서는 공동어로구역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이곳 어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게 가능하겠냐고 반문한다. 섬 주민 특유의 보수적인 성향도 한몫한다. 한 주민은 “강하게 치고 올라가든가, (북한 해군에게 남한 해군이) 밀리면 주민들을 이주시키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떤 어민은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면 전국의 배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지 않겠냐”며 어획량 감소를 우려했다.

대다수 어민들은 남측 어선에 교전의 일부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적의를 드러내면서 사태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한반도의 평화가 생계를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해군 경비정으로 어선들을 단속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평화적인 해결책이 모색되지 않는다면 어민들은 또다시 위험천만한 바다에 나갈 수밖에 없고, 남북 충돌 가능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연평도에 머문 그날 TV 뉴스에서는 김동신 국방장관이 앞으로 서해 경계를 철저히 하고, 불법조업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히고 있었다.

“꽃게들은 다 박스(조업구역) 밖에 있는데 못 나가게 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라고. 이제 이 섬을 떠날 채비하라는 이야긴가?”

TV를 지켜보던 한 어부가 소주병을 기울였다.

한태욱(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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