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8월 2002-08-10   976

세상이 나를 눌러? 연극으로 풀어버려!

토론 연극 2박 3일 체험기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면서 주말 여가를 이용해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보도를 하면서도(본지 2002년 7월호) 실감이 나질 않았다. 더구나 그들이 한다는 토론연극은 너무도 낯설었다. 사람들과 마주앉아 설전을 벌이는 것 이상의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직접 찾아가 2박3일 동안 경험해 본 결과 토론연극은 속시원한 한 편의 놀이였다. 어릴 적 소꿉놀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듯 그들은 연극을 통해 세상에게 말하고 억눌린 감정을 풀었다.

당신의 억압은 무엇인가?

교육연극 웹진 놀랬지넷(http://www.nolatzi.net)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극공간 ‘해(解)’는 7월 4∼6일 서울 대학로에서 토론연극 워크숍을 열었다.

첫날. 참가자들은 바닥에 몇 명씩 모여 앉아 있었다. 나이는 20대 초반부터 40대 중반에 걸쳐 있었고 여자가 더 많았다. 이끔이(워크숍에서 리더 노릇을 하는 사람) 심숙경 씨가 나와 일어나 몸을 풀자고 한다. 참가자들은 빠르게 뛰기도 하고 천천히 걷기도 했다. 이어서 땀흘리는 놀이와 적당한 피부접촉이 곁들여진 순서가 진행되고 나자 분위기는 한층 자연스러워졌다.

그중 인상 깊었던 것은 시간 놀이다. 자유롭게 걷다 리더가 “수요일 저녁 7시!” 하고 외치면 참가자들은 그때 자기가 하고 있을 법한 행동을 순간적으로 보여준다. 토요일 오후 3시, 일요일 아침 10시, 추석날 아침 8시, 생일날 저녁 등 다양한 시간대가 나왔다. 참가자들이 차츰 놀이에 빠져들면서 평소 생활 패턴이 그대로 나온다. 한결 솔직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놀이가 끝나자 참가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주부들은 몇 시를 불러도 대부분 밥을 하는 자신을 흉내낸다. 직장인들은 전화만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아, 나는 애들 밥하고 청소만 하는 사람이구나, 혹은 도대체 나는 늘 전화만 받는다는 말인가 하면서 우울해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심숙경 씨는 그간의 경험을 들며 일반적인 현상임을 강조한다.

구경하다 뛰어들다

둘쨋날. 조금 떨어져서 참가자들을 관찰하다 뛰어들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참가자들의 심정을 느껴보고 싶었고 전날보다 한결 밝아진 얼굴을 보니 욕심이 생겼다. 이날의 주요 순서는 ‘싸우기 놀이’와 ‘억압을 소리로 표현하기’다.

먼저 싸우는 놀이. 짝을 정해서 자신이 가장 화났던 순간을 떠올리고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 화내는 이유를 사전에 설명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화를 내기 시작하면 상대는 그 이유를 추측해 대응에 들어간다.

우리 팀은 부부싸움을 했다. “당신은 도대체 내가 이렇게 일을 하고 오는데 또 애를 보라는 게 말이 되는 거야? 남자도 힘들 때가 있다구. 당신은 왜 내게 늘 완벽하고 강할 것만 요구하는 거야? 도대체 어떤 남자가 가사 분담에 이 정도로 충실하냐고? 그럼 인정해 줘야 하는 거 아냐?” 하고 싸움을 걸어온다. 그러면 한쪽은 “결혼해서 같이 살면 역할을 나누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밥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왜 당신은 애 우유 먹이는 걸로 대접받으려 드느냐”며 큰소리로 대거리를 했다. 익숙한 소재는 아니었지만 누군가와 싸운다는 것이 낯설면서도 후련했다. “나는 싸우다가 더 화가 나서 흥분했어요. 정말 화나더라고. 그때 내가 왜 참았는지 몰라” 하면서 가슴을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싸움을 거는 쪽이었는데 싸우다 보니 상대방에게 미안해서 울어버렸지 뭐예요”라며 멋쩍게 웃는 사람도 있었다.

전날 이끔이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불행했던 기억을 하나씩 생각해 오라고 했다. 그리고 현재 자신이 받는 억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떠올려 오라고 했다. 음악이 나왔다. 연습실의 불은 꺼졌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이끔이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그 느낌을 소리로 표현해 보세요. 큰 소리로 아주 오랫동안 표현해 보세요” 하고 말했다. 모두 웃으며 행복해 한다.

다음은 불행. 마찬가지로 그것을 떠올리고 소리로 표현해 보라고 했다. 침묵이 흐른 뒤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졌다. 한숨 소리, 짜증내는 소리, 신경질적으로 질러대는 소리들. 이끔이는 참가자 중 네 명을 연습실 모퉁이에 한 명씩 앉게 한다.

“네 명은 소리를 계속 내세요.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소리와 가장 비슷한 곳으로 가세요. 소리를 잘 들어보면 자신의 느낌과 비슷한 소리를 발견할 수 있어요. 가장 비슷한 소리로 가세요.”

억압을 연극으로

셋쨋날. 본격적인 ‘연극만들기’에 들어갔다. 전날 ‘불행’에 대한 소리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대화를 한 뒤라 쉽게 말이 통했다. 세 모둠으로 나누어 소재를 정해 연극의 첫 장면만 만들기로 했다.

우리 팀이 만든 장면은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이다. 30대 후반의 여성이 아빠 역할을 하고, 40대 중반의 남성이 엄마 역할을 맡았다. 밤 11시에 들어오는 딸에게 늦게 귀가했다고 걸레를 던지지만, 같은 시간에 아들이 들어오면 “밥은 먹었냐”고 묻는 장면이다. 첫 장면만 만들었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연극에 빠져 들어갔다. 대본은 필요 없었다. 몸이 가는 대로, 말이 나오는 대로 하면 된다. 모두 나의 이야기고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관객이 뛰어들어 연극을 멈추게 하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무대 위에서 직접 실행한다.

워크숍 참가자 김은균 씨(35세)는 이렇게 말했다. “소외됐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토론연극을 권한다. 당당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낯선 사람들과 하는 것도 좋지만 가족이나 직장에서 함께 해보면 많은 갈등 상황이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발견한 ‘나’라는 존재가 매우 낯설었고 그걸 발견하는 기분이 좋았다. 2박3일도 짧은 것 같다. 서로 친밀감이 있으면 더 깊고 솔직한 얘기를 연극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극공간 ‘해(解)’의 모미나 씨는 “시민단체 안에서도 많은 대화가 요구되고 활동가들의 자기관리가 필요하지만 많은 단체들이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이 활동가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속마음을 들을 수 있게 할 것”이라며 시민단체들에 토론연극을 권했다.

살아가면서 억압에 대처하는 방식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연극은 사람의 긴장을 쉽게 풀어주고 마음을 터놓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황지희(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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