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1월 2010-01-01   1788

나라살림 흥망사_동로마제국 천년을 지킨 힘, 공평한 과세



동로마제국 천년을 지킨 힘, 공평한 과세



정창수 전 최재천 의원 보좌관, 예산전문가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정복자 메메드2세가 이끄는 투르크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였다. 오스만 술탄의 포병대는 과거 천년이 넘도록 강력한 군대들이 점령하지 못한 곳,  동로마제국의 수도를 점령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는 동로마제국을 구하려는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도시는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영원한 줄 알았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이로서 1123년의 서사시가 막을 내렸다.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나라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가 기록되고 나서의 기록으로는 동로마제국이 가장 오래 지속된 국가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로마에 수도를 두었던 서로마제국의 몰락이 로마의 몰락이며 그 이후를 중세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서유럽을 중심에 두고 보는 역사인식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도 않았지만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도 않았다. 330년부터 자그마치 1453년까지 천년을 넘게 존속했다.

그 나라가 바로 동로마제국이다. 로마공화정의 시작인 BC 509년부터 따진다면 2천 년을 유지한 것이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이 1453년이었으니, 근대의 여명까지도 존속했던 셈이다.

만약 우리가 러시아나 동구의 영향을 받았다면 아마도 크리스마스도 12월 25일이 아니라 동로마제국 정교회의 영향을 받아 1월 7일에 기념했을 수도 있다.


‘빵과 서커스’로 지탱된 서로마

동서를 연결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서구 국가들은 동방과의 교역을 위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1488년 포르투갈 항해가 B.디아스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달하고 1492년 C.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한다. 그리고 세계를 제패하면서 역사의 중심을 그들에게 맞추어 버렸다. 동로마의 역사도 묻혀버렸다.

그러나 서유럽국가들은 동로마제국에 큰 빚을 지게 된다. 동로마의 유산과 유민들은 서유럽으로 이동하여 르네상스를 가져온다. 비로소 유럽이 어둠에서 깨어나게 된다. 종교개혁의 요구가 들풀처럼 전 유럽을 불태우면서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동로마는 서유럽이 근대로 넘어가는 가교역할을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서로마제국은 용병대장 ‘오토아케르’에 멸망당한다. 초기부터 시민군 중심으로 운영되던 서로마는 전쟁과정에서 획득된 노예 중심의 ‘라티푼디움’이라는 농장형태가 등장하면서 중소 농민이 몰락하게 된다. 그 잉여생산물은 몰락한 일반시민들에게 ‘빵과 서커스’로 제공된다. 번영의 결과를 가지고 체제의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그 환상도 노예공급이 감소하면서 끝이 난다. 노예공급이 줄어들면서 대토지 소유자를 중심으로 ‘콜로나투스’라는 대농장이 형성되고 예속농민이 편입되고 서서히 농노화되어 중세시대 ‘장원’의 시초가 된다.

현재와 비교해본다면 미국이 비슷하지 않을까? 과거 ‘빵과 서커스’에 의해 지탱되던 로마시민들의 운명처럼, 기축통화와 군사력 유지가 어려워지면 소비사회의 ‘복지와 스포츠’도 한계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중소농민이 주축이 된 동로마의 군대

이 나라는 어떻게 천년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을까?  테오도시우스성벽이 굳건해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몇 가지 행운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여러 가지 답이 있겠지만 모든 것은 사람, 그 중에서도 강력한 군대가 있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 병사들은 자신의 가족과 땅을 지키려는 ‘테메’의 병사들이었다. 테메는 소아시아의 징집병들이었고 그들은 ‘둔전병제’로 자신의 땅을 가진 중소농민들이었다. 중앙에는 ‘타그마타’라고 하는 용병들도 있기는 하였지만 ‘테메’가 국가방어에 주축이었다. 동로마 개혁의 역사는 이 테메를 이루는 중소농민을 지키고 확대하는 과정의 역사였다.

초기에 동로마는 용병 위주였으나 7세기부터 이슬람 군대에게 계속 패배하면서 정책을 수정하게 된다. 그래서 세금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군사적인 의무를 다하는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인 ‘테메’가 등장한다.

‘스트라티오테’라고도 불리는 이 농민군은 자신의 가족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므로 효율적이고 저렴한 비용으로 유지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생계문제도 스스로 해결했다.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걷느냐’와 ‘어떻게 걷느냐’

동서양 공히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조세와 군역은 국력의 척도이다. 따라서 세금을 걷고 군사력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해주는 것이다.  그 핵심은 나라마다 다르게 표현하지만 자신의 땅을 소유하고 세금을 내며 군역에 종사하는 둔전병제에 있었다.

이들은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이나 직업군인들과 달라서 잃어버릴 것이 있는 계층이었다. 둔전병제의 시행은 공평하게 세금내고 군역을 수행하는 시민들이 국가의 중추로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국가적 결속력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조건을 제공해준다. 세금이란 ‘얼마나 걷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걷는가’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국가는 건국초기에는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조세의 형평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게끔 노력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나 걷는가’만 중요하게 된다. 필연적으로 부의 집중과 불평등을 낳게 되고 사회적 일체감은 무너진다. 종국에는 그 ‘얼마’도 걷지 못하게 되는 ‘시스템 붕괴현상’에 직면하여 멸망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혁명으로 땅과 집이 생긴 지원병들로 이루어져, 용병으로 이루어진 다른 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유럽을 제패한 것도 좋은 예이다. 또한 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많은 전쟁에서 지면서도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둔전병제로 인한 군대의 확보와 재정의 안정 때문이다.


양극화가 초래할 잘못된 미래

우리나라의 양반은 군역과 요역 등에서 면제받고 전세도 내지 않았다. 자칭 ‘사대부’라 칭하면서 고통은 민중에게 전가시키고 자신들은 권력을 행사했다. 영조시대에 양반의 비율은 50%를 넘었다. 1995년 갑오경장 당시에는 양반의 비율이 80%를 넘었기 때문에, 해방시킨 공노비의 수가 5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극소수의 사람이 세금을 내고 군역을 수행한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과거의 둔전병은 ‘현대판 중산층’이 아닐까 한다. 부의 분산과 그로인한 공평한 과세 이것이 동로마제국의 병사들이 목숨 걸고 국가공동체를 지켜야하는 이유였고 그들이 천년을 지속하게 된 이유이다. 군역도 세금의 일종이다.

소수에 의한 부의 집중, 그리고 서민들의 중과세, 부유계층의 조세회피는 국가공동체를 심각하게 균열시키는 요소이다. 지금 급속히 진행되는 양극화는 이런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보이고 있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잘못된 과거는 잘못된 미래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직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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