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1월 2010-01-01   1356

그때 그 노래_외모지상주의, 거짓말이야



외모지상주의, 거짓말이야



최양현진

요즘 가요계를 보면 아주 예쁜 가수들이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때 꽃미남이라는 칭호와 함께 10대 소녀들의 사랑을 받던 아이돌 가수들이 잠시 주춤한 사이에 ‘꿀벅지’라는 말과 함께 걸그룹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가수도 이제 노래만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예기획사들이 예쁘고 춤 잘 추는 아이들을 모아서 가수로 데뷔시키고 청소년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걸그룹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를 그들에게 맞추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외모 지상주의 시대에 노래잘하는 가수가 살아남기는 너무 힘들다. 더구나 그런 가수가 장애인이라면 어떨까?

외국 팝계를 보면 모든 가수들에게 존경받는 장애인 음악인들이 매우 많고 그들이 아직까지도 활동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오지 오스본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랜디 로즈Randy Rhoads는 소아마비였지만 그는 기타 하나로 당대 최고의 보컬리스트였던 오지 오스본과 함께 그룹을 만들고 연주했다. 시각장애인의 경우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도 음악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시각 뿐 아니라 미각까지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가수로 성장했다. 레이 찰스Ray Charles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과 흑인, 시각장애인이라는 한계에도 백인을 능가하는 가창력으로 미국 팝계를 사로잡은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장애인 가수가 누가 있을까? 아마 몇 명 떠올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소아마비 가수로는 조덕배가 있었고, 시각장애인가수로는 이용복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싸이키델릭에 있어서 최고의 가창력을 인정받은 가수인 윤용균에 대해서는 아마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6,70년대 신중현은 한국 록음악의 대부였다. 서울맹학교 졸업반이던 윤용균은 무조건 신중현을 찾아갔고 그의 노래실력을 인정한 신중현은 그에게 세곡의 노래를 준다. 그중 ‘내 곁에 있어주오’는 상당한 인기를 모으며 당시 최고의 잡지인 <선데이 서울>에 그의 스토리가 실리면서 신중현 사단에서 윤용균의 시대를 알렸다. 73년 그는 첫 음반인 ‘내 곁에 있어주오’를 발표한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LP의 B면 전체를 차지한 23분의 대곡 ‘거짓말이야’를 덧붙여 총 6곡의 음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음반은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윤용균은 재기하지 못하고 우리 곁을 사라져야 했다. 그러나 그의 재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당시 유신정권의 사회정화 차원에서 벌어진 이른바 ‘신중현의 대마초 사건’이었다. 자신의 노래를 알아주던 신중현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더 이상 그를 위해 노래를 줄 작곡가는 없었다. 무대는 트로트 일색으로 변했다. 여기에 사회정화는 장애인 가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서울맹학교 2년 후배였던 이용복 등의 시각장애인 가수들이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더 이상 방송무대에 설 수가 없었다. 그 유명한 이용복도 설 수 없는 무대를 당시 신인가수였던 윤용균에게는 더한 무게로 다가왔다. 이러한 경향은 80년대 전두환 정권까지 지속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90년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외모중심의 가수들이 방송을 장악하는 시대에 장애인 가수들의 무대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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