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4월 2013-04-06   3091

[특집] 서울에서 세입자로 살아남기

서울에서 세입자로 살아남기

 

 

박선희 대학생

 

 

‘이제 어디서 자야 하지?’

 

2009년,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내가 가장 먼저 한 걱정이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간다는 것은 기쁨보다 ‘걱정’이었다. 서울엔 가족도 집도 없었고, 무엇보다 등록금을 내고 집을 구할 돈이 없었다.

 

다행히 대학 입학 첫해에는 향토 기숙사에 자리를 잡아 살았다. 지자체에서 해당 지방 학생들의 주거부담완화를 위해 설립한 기숙사였다. 싸고 시설도 좋았지만 통학 시간 왕복 세 시간에 통금, 외박 제한 등 제약이 많았다. 조별 과제가 많을 땐 기숙사에서 자는 날보다 친구 방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아졌다. 결국 1년간 돈을 모아 2010년 8월에 학교 앞에 첫 자취방을 얻었다.

 

21년 평생에 첫 ‘나만의 방’이었다. 삼남매 중 둘째인 나는 그 때까지 한 번도 홀로 방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에서 첫 세입자가 된 그 때, 나는 홀로 방을 쓴다는 생각에 마냥 설렜다. 그게 3년간 여덟 번 이사를 하는 주거 전쟁의 시작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일대 원룸촌 전경

중앙대, 숭실대, 노량진이 있는 동작구는 일반 주택을 개조해 하숙이나 월세를 놓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자취방일수록 보증금이나 세가 싸지만 신식 원룸 건물보다 더럽거나 치안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진은 동작구 흑석동 일대 원룸촌 전경.

 

나만의 러브하우스? 공용의 더티 하우스!

 

내 첫 번째 자취방은 외국으로 치면 ‘쉐어 하우스’ 방식이었다. 일반 주택에서 방마다 세를 주고 거실과 부엌, 화장실을 공동으로 쓰는 식이었다. 보일러도 세탁기도 공용으로 사용했다. 월세 25만 원에 보증금 200만 원. 공과금, 관리비 포함이었으니 서울 치고 싼 편이었다. 첫 자취 계획은 창대했다. 밥을 해먹을 요량으로 쌀, 고추장, 된장을 구비했다. 꿈은 금방 무너졌다.

 

공용으로 쓰니 부엌과 화장실이 너무 더러웠다. 설거지통에는 먹다 남은 음식물 그릇들이 섞여 있었고, 가스레인지도 기름때에 절어 있었다. 냉장고에는 “102호입니다. 제 요플레 드신 분 사다놓으세요” 하는 쪽지가 여럿 붙어 있었다. 냉동실에는 정체 모를 양념 고기들이 한 데 뭉쳐 있었다. 변기가 막히는 일도 다반사였다. 화장실과 부엌에서 나는 오묘한 냄새 때문에 방 밖으로 나고 드는 게 고역이었다.

 

관리비를 내고 있는데도 관리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집을 비워 한 달 동안 치우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동안 변기가 막혀 모든 볼일을 학교에서 해결했다. 11월에는 보일러가 고장 나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 아주머니에게 항변해봐야 소용도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답만 돌아올 뿐, 집주인 사전에 ‘보상’은 없다. “못살겠다”하면 “나가라”하면 그 뿐. 집주인이 고장 난 걸 “고치겠다”고 답하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었다.

 

 

도시에서 가장 열악한 방, ‘고시원’

 

그렇게 한 학기를 ‘나만의 방’에 학을 떼고, 방학은 안락한 고향집에서 보냈다. 4개월의 자취 생활로 타향살이의 고달픔을 깨달았다면 우습겠지만, 방보다 ‘집’이 중요하단 사실은 뼈저리게 느꼈다.

 

2011년 새 학기는 다시 향토 기숙사에서 시작했지만 그래도 오래 버티진 못했다. 결국 20만 원짜리 학교 앞 고시원에서 다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고시원은 자취생활의 끝을 달렸다. 옆방 학생이 드라마 보는 소리, 앞방 직장인 알람 소리, 휴게실 TV소리, 새벽에 화장실 쓰는 소리까지. 귀마개를 껴도 고시원 방의 얇은 벽은 온갖 소음을 들려줬다. 게다가 창문이 없었다. 환기가 안 되고 해가 들지 않았다.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안 되니 지각을 밥 먹듯 하다 기말시험에까지 늦었다.

 

사정이 이러니 5개월 간의 고시원 생활을 접고 안양 이모네 집으로 이사했다. 따뜻한 햇볕과 바람이 있는 편리한 아파트였다. 한동안 편하게 지냈지만 이모네 집은 ‘내 집’은 아니었다. 2012년 2월 다시 조그만 ‘내 방’을 마련했다. 부엌과 화장실도 혼자 쓰고, 창문도 있고, 해도 조금 드는 집이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단 두 평의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빨래를 하면 건조대 날개 밑에서 자야 하는 아주 조그만 방이었다. 그래도 주거비는 내가 살았던 방 중에서 가장 비쌌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20만 원, 관리비 1만 원에 공과금 별도.

 

 

전세를 얻어도 도시 세입자는 불안하다

 

2013년. 지금은 대학생 전세자금대출 제도를 이용해 전셋집에 산다. LH에서 전세자금을 빌려주고, 선정된 학생은 월 이자만 부담하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살았던 방 중엔 가장 집다운 방이다. 2년 계약을 해서 한동안은 이사할 일도 없다. 한시적인 주거 안정인 셈이다.

 

4년간 아홉 번이나 싸고 풀었던 살림살이들

2012년 10월, LH 대학생 전세자금대출 제도를 이요해 전셋집을 얻었다. 이사전까지 약 2달 동안 이 많은 짐들과 함께 친구네 집에 신세를 지고 살았다. 4년간 아홉 번이나 싸고 풀었던 내 살림살이들.

 

 

그래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겨우내 방 곳곳에 곰팡이가 펴 매일 닦아내고 약을 뿌리며 전쟁을 치렀다. 곰팡이 먹은 집이나마 대학 생활이 끝나면 함께 끝이다. 대학생을 위한 전세자금대출을 이용했으니, 졸업하면 이 집과도 ‘안녕’이다. 모아둔 돈은 없고, 싼 집은 더럽거나, 시끄럽거나, 어둡거나……. 어쨌든 열악하다. 그 전에 거금을 받는 직장을 구한다면 문제 없겠지만, 쉬운 얘긴 아니다. 만약 취직을 못한다면? 월세와 생활비를 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구직 활동까지 할 수 있을까.  

 

 

박선희

충북 제천에서 나고 자라 현재 서울에서 자취중인 휴학생. 

대학 4학년 1학기를 마친 후 취업 전쟁에 뛰어들기 무서워 잠시 쉬는 중. 

2012년 여름 인턴으로 참여연대와 인연을 맺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