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4월 2013-04-06   2201

[특집] 온전한 집

집은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온전한 집이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하는지,
집에 얽힌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종류의 애환들.
그걸 해결하려면 어떤 정책이, 어떤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지,
참여사회가 집을 위한 집이 아닌 사람이 있는 집을 알아봅니다. 
참여사회 2013. 04월호>> 

온전한 집 / 박철수 
서울에서 세입자로 살아남기 / 박선희 
집보다 사람! 사람을 위한 주거정책은? / 서채란 
삶의 공간인가, 소유의 공간인가? / 전성환

 

온전한 집

박철수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기억을 퍼 올리는 마르지 않는 샘

 

일러스트 황진주

 

2년 전 우리 곁을 떠난 박완서 선생은 40년의 작가 생활을 통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글을 남겼다. 길고 짧은 소설과 수필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동화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이야기를 남긴 작가 중 한 분이다. 필자는 작가의 작품을 한 마디로 뭉뚱그려 말할 깜냥은 못 되지만 작가의 다채로운 글들은 적어도 공간과 장소에 대한 재현 가치와 더불어 우리가 어떻게 지난 세월을 살아냈는가를 민낯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독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알아차릴 정도다. 가운데 흥미를 일으키는 대목은 ‘집’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집은 모두 세 곳이다. 하나는 작가가 나서 자란 개풍군 박적골의 조선 기와집인데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거나 동무들과 더불어 즐겁게 생활을 하던 유년의 기억을 품은 장소로 묘사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소설 『엄마의 말뚝』에 등장하는 현저동 ‘괴불마당 집’이다. 마당이 괴불처럼 세모여서 괴불마당 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지막은 노년의 느린 삶을 품어주었던 아치울 마을의 땅집(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이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 작가가 살았던 이 집들에 대해 소설이나 수필을 막론하고 끊임없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그 집들은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고장으로서의 고향이며, 그런 까닭에 작가 생활 40년을 버티게 한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길어 올리거나 떠내도 마르지 않는 샘.

 

박적골의 조선 기와집은 유년의 기억을 온전하게 한 장소였다. 서울 사람이 되었음을, 그리고 번듯한 내 집을 가진 특별시민이 되었음을 어렴풋하게 확인시켜준 괴불마당 집은 가족의 울타리를 제대로 만들게 한 장소였다. 그리고 작가에게 주어진 삶의 마지막 12년을 안식과 평화로 바꾸어 준 곳이 바로 아치울 마을의 마당 딸린 집이다.

 

 

두꺼운 삶

 

1990년 작고한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현은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를 비난하는 체하는 자기모순. 나에게 칼이 있다면 그것으로 나를 치리라. 나를!’이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글을 30여 년 전에 잡지를 통해 발표한 바 있다. 글의 제목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문학평론집 제목이기도 한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이다. 당시 그는 반포의 서른두 평짜리 아파트에 사년 째 살면서 처음 문패를 달았던 땅집의 낮은 지하실과 높은 다락방을 그리워했고, 이웃들이 왁자하던 외갓집의 너른 부엌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낸 고향 남도의 조그마한 섬을 마음 끝자락에 두곤 했다.

 

그리고 사물과 인간의 두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라야 두꺼운 삶을 사는 것이고, 깊이가 없는 평면적인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질타한 바 있다. 모든 것의 깊이를 무시한 엷은 시선을 떨쳐버리고자 수없이 많은 밤을 고민했노라 했다. 칼이 있으면 나를 치리라는 자학에 가까운 절규 속에서 그가 걱정한 바는 아이들의 미래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겹겹으로 만들어질 아이들의 인생을 풍요롭게 할 것인가를 걱정한 것이다.

 

 

기억공동체로서의 집

 

일러스트 황진주

 

집이란 곧 크고 작은 편린의 기억들을 두텁게 쌓아 두는 공간이며, 기억이란 가족이라는 씨실과 시간과 이웃이라는 날실이 촘촘하게 엮여 만들어낸 삶의 실체이자 온전한 삶의 뿌리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개인의 삶이 당연하게도 역사가 되는 것은 두터운 기억의 이어달리기가 만들어내는 힘이며, 가족, 시간, 곁을 주는 이웃에 대한 기억을 길어 올리는 마르지 않는 샘이 곧 집이다.

 

기억공동체로서의 집을 되찾기 위해서는 가족과 시간 그리고 이웃이 관건이다. 머묾은 가족과 시간의 중첩과 누적이 그 두께를 만들어 줄 것이며, 이웃은 장소에 개인이나 가족공동체의 일상이 얼마나 깃드는가에 달린 것이다. 결국 한 곳에 뿌리내리고 오래 머물러 사는 정주定住와 가족의 일상생활이 어느 정도까지 번져나갈 수 있는가에 기억의 깊이와 삶의 두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제 돌아보자. ‘마분지로 만든 얄팍하고 각진 신도시’(전경린, 『여름휴가』)에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보금자리’(이창동,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어렵사리 마련하고는 ‘베란다 너머 병풍처럼 서 있는 고층아파트’(배명희, 『온수관』)를 쳐다보며 ‘송파는 강남 바로 턱 밑, 분당은 미니 강남, 강동은 진군 중. 강북 하고도 상계는 두통 나는 곳’(우영창, 『하늘다리』)이라는 허언을 믿으며 ‘십억 짜리 아파트에 살며 이십억이 안 되니까 안심할 수 없다 엄살떠는 중산층’(이지민, 『타파웨어에 대한 명상』)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온전한 삶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항로를 벗어날까 노심초사하며 무리지음과 서열화의 공간 정치 현장에 뛰어들어 아파트에서 아파트로의 이사를 일삼는 아파트 유목민이 참된 내 모습인가 말이다.

 

우리 세대가 앞만 보고 달려 고향을 잃은 실향 세대라 한다면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는 퍼내도 마르지 않는 온전한 기억의 샘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공간과 장소의 두께를 입체적으로 느끼고 그 속에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만들고 키운 가족들과의 기억을 쌓을 수 있도록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두꺼운 삶의 필요조건이다. 집값의 오르내림에 들썩거리는 얄팍한 내 자신보다는 동무를 잃고 새로운 환경에 두려워할 아이의 조바심을 먼저 다독이는 마음이 필요하다.

 

도시학자인 얀겔Jan Gehl은 ‘흥미와 속도는 반비례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빠른 길은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반면 느린 속도로 지나치는 길은 다양한 재미와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하는 말이다. 이 말에 삶의 속도 아니 이사의 빈도를 대입시키면 기억의 누적을 통해 두꺼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는 자명하다. 적어도 다음 세대의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어른들의 도리가 아닐까.

 

 

열린 사회를 향한 단지의 해체

 

일러스트 황진주

 

이웃 역시 시간의 종속변수다. 다만 시간이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 한 곳에 아무리 오래 머물며 삶을 의탁했다 하더라도 열린 사회를 향한 바른 태도를 가지지 못한다면 역시 두꺼운 삶에 다다를 수 없다. 좁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늘을 가릴 정도의 높은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단지團地 안에서 자폐적인 삶을 산다면 그것은 얇은 삶에 다름 아니다.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채 규격화 된 칸막이 안에 자신을 가둔 사람들’(김사과, 『미나』)이 ‘도시 속의 완벽한 요새’(김채원, 『푸른 미로』)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구가한다면 이는 곧 물리적 이익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고향이 될 리 만무하다. 고향은 열린 사회에서 얻어지는 과실이며, 어울림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닫힌 사회는 배격되어야 한다. 그래야 깃듦의 기억이 쌓이는 것이다.

 

아무리 퍼내도 기억이 마르지 않는 샘이 곧 집이고, 두터운 기억이 곧 두터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한 곳에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는 정주와 열린 사회를 향한 단지의 해체야말로 온전한 집이 존재하게 하는 조건이다.  

 

 

박철수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소의 연구위원을 거쳐 

2002년부터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공동주택계획론과 주거문화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아파트의 문화사』, 『한국공동주택계획의 역사』,『아파트와 바꾼 집』 등 4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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