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11월 2005-11-01   1275

미싱을 타고 전해오는 전태일의 외침

1755년 경 영국에 살던 독일인 바이젠탈은 무두질한 가죽이나 옷감을 꿰맬 수 있는 기계장치를 제작하였고, 1851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아이작 싱어가 성능을 향상시킨 표준형 가정용 기계를 발명했다. 스윙머신(Sewing Mashine)이라 불리는 이 기계는 1860년 견미사절단의 수행원이었던 존 만지로(J. 万次郞)에 의해 처음으로 일본에 들어왔다. 일본인들은 스윙머신을 재봉기(裁縫機)로 번역했으나 ‘미싱’이라고도 불렀다.

미싱은 19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1901년 5월 17일자 『황성신문』에 제직회사 사원모집 광고문이 실려 있고, 1907년 12월에 발행된 서우학회의 기관지『서우』에 ‘세계 제일의 거선과 거옥’을 소개하면서 ‘씽가 재봉기 상회의 건물’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1908년 1월 11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백주 대낮에 가정집에 도둑이 들어 ‘재봉틀’을 빼앗아 갔다는 기사가 실렸고, 1913년 10월 14일~28일에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보』에도 경흥의 수입품 목록에 ‘재봉기계’가 들어 있다.

미싱의 도입으로 기계식 봉제공업이 발달하였고, 노동집약적인 특성으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게 되었다. 일제식민지 시기 방직공장과 봉제공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원산 총파업(1929), 가타쿠라제사공장(片倉製絲工場) 파업과 경성방직공장 파업(1931), 씽거미싱 파업(1932) 등에 참가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방직회사 봉제회사 노동자들은 전평총파업(1946), 대구대한방직쟁의(1956), 섬유노조쟁의(1959) 등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엄청난 폭압통치 아래에서는 숨 죽인 채 ‘드르륵 득득’ 미싱만 돌렸다.

1965년 가을, 전태일이라는 18세의 소년이 평화시장의 한 피복공장에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열 살이 갓 넘은 소녀들이 허리조차 펴기 힘든 열악한 환경에서 점심까지 굶어가며 하루 14~16시간의 노동을 할 때였다. 그녀들이 받는 일당은 70~80원으로, 하루 종일 노예처럼 일하고도 당시 커피 한 잔 값이었던 50원을 조금 넘게 받는 현실을 전태일은 받아들기 힘들었다.

1968년 무렵 전태일은 아버지로부터 해방 직후 대구 방직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 1946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총파업에 참가한 경험담을 들었다. 전태일은 처음으로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동료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을 함께 공부하고,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를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업주들은 전태일을 위험분자로 지목하고 해고시켰다. 그 후 전태일은 청계천을 떠나 막노동판에서 일하다가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재단사로 취직했다. 그는 옛 동료들과 ‘불법적이고 비인간적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이다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요구하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마침내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전노협 민주노총 건설,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올 10월에 새롭게 개통된 청계천변의 평화시장 앞에는 ‘전태일거리’가 조성되었다. 버들다리 위에는 전태일 동상이 건립되고, 4,000개의 기념동판이 새겨졌다. 부디 청계천을 따라 걷는 많은 시민들이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전해오는 전태일의 외침을 가슴으로 들을 수 있기를…….

박상표 참여연대 회원,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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