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3월 2007-03-01   926

대통령과 민주주의, 그 가능성과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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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이 직접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다면 국민이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국가가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나온 것이 국민이 대표에게 권한을 위임해 대표들로 하여금 국민을 대신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도록 하는 대의민주주의이다.

대통령제의 고갱이는 권력분립

대의민주주의는 정책의 결정권과 집행권을 분리하지 않고 동일한 대의체에 위임하는지, 아니면 정책의 결정권과 집행권을 분리해 각기 다른 대의체에 위임하는지에 따라서 의원내각제(의회민주주의)와 대통령제(대통령민주주의)로 나누어진다. 현실정치에서 존재하는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는 채택하고 있는 나라의 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의원내각제는 정책의 결정권과 집행권을 동일한 기관이 가지는 권력융합형인 반면, 대통령제는 정책결정권과 집행권이 나누어져 있는 권력분산형이라는 차이가 있다.

의원내각제는 권력융합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고, 그 의회에서 내각을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또, 의회다수파의 변화가 즉각 내각에 반영될 수 있도록 내각의 임기는 의회의 신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하고 있다. 의회의 다수파가 내각을 구성하므로 내각과 의회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정책적인 충돌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권력분립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대통령제는 의회와 대통령의 임기를 독립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물론, 선거도 분리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의회의 다수파와 대통령이 동일한 정파를 대변하지 않는 분점정부, 소위 여소야대가 출현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의회와 대통령 간에는 정책적인 충돌이 일어나곤 한다.

대통령제인가, 대통령중심제인가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권력의 분립’이 대통령제가 기반하고 있는 근본원칙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망각되곤 한다. 이는 정치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권력이 대통령으로 집중되는 권위주의 시절의 기억이 대통령제의 원형에 대한 오해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통령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권력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대통령중심제’라는 용어가 전문가, 비전문가 할 것 없이 빈번히 사용되기도 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왜곡된 형태의 대통령제를 우리의 생각과 정치현실에서 털어내지 못한 것은 민주화가 단순히 ‘대통령을 내손으로 뽑는다’는 직선제와 동일시되었고,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는 권력분립의 추가 어디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 국민적 성찰이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민주화 헌법이라고 하는 87년 헌법조차 국회의 회기를 제한하는 등 국회가 본연의 책무를 다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3김’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존재와 권위주의 시절에 만들어진 상명하달의 동원적 정당구조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정당, 메시아를 기다리는 국민들 모두 권위주의적 대통령제의 생명연장에 한 몫 해왔다.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때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메시아를 만난 듯 열광하였고, 대통령의 권한이 정당하게 행사되는지, 그의 결정이 올바른지 따져 묻지 않았다. 견제의 부재는 오만과 독선이라는 괴물을 키워나갔다. 대통령의 임기 말이 되면 대통령도 국민도 대통령제의 최면에서 깨어나지만, 그 때는 이미 국민과 대통령이 더 이상 정책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나서였다.

노대통령의 탈권위주의 대통령 실험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된 대통령에 대한 권한 집중과 그 결과인 실패한 대통령에 식상한 국민들에게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메시지는 없었다. 임기 초 노무현 대통령은 소위 권력기관이 제공해온 정치정보를 거부하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탈권위주의적 대통령상을 정립하고자 하는 듯이 보였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총리와 권한을 나누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실시하겠다고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러한 시도는 분명 과거의 권위주의적 대통령들과는 구분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도 87년 헌법의 미비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마저 갖게 했다. 국회의 인사청문회 결과를 대통령이 소중히 수용하는 관행을 만들어 개헌하지 않고도 인사청문회를 사실상의 인준청문회로 격상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 헌법재판관들이 헌법재판소장을 호선하도록 하고 대통령이 이를 수용해 헌법재판소장을 지명하게 되면 개헌하지 않고도 사법부의 왜소한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기대를 해보게도 만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총리와 권한을 나누는 분권형 대통령제는 총리가 대통령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회를 호통치는 실세형 총리를 낳았을 뿐이고, 이것이 결국 열린우리당을 왜소화시켜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탈당사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인사청문회가 사실상의 인준청문회로 격상되기는커녕 인사권은 대통령 고유의 권한이라는 헌법규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고, 헌법재판소조차 정쟁에 의해 마비될 수 있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과 국민의 소통이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국민이 원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푸는 방법도 다 알고 있다’는 전직 대통령의 말처럼 노 대통령 역시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교육대상으로 보는 계몽군주적 환상에 빠져드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대통령에로의 권력 집중은 되레 걸림돌

물론, 우리의 대통령제가 어두운 면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건국 60년 만에 다른 나라는 수백 년에 걸쳐서 이룩한 국가건설,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를 모두 이루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강력한 대통령이 존재하였던 것도 한 몫 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다르다. 과거처럼 다른 나라를 벤치마킹하는 전략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국가가 나아가야 할 목표와 방향이 과거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만들어나가야 하는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권한이 집중된 대통령은 사회적 소통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제 권한을 집중시켜 놓고 메시아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악마가 집권해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제를 정립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김민전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 경희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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