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3월 2007-03-01   1470

역대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었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대통령직을 역임한 사람은 현 노무현 대통령까지 모두 9명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개인적인 특성은 물론 지도력 행사방식에서 차이점을 보여준다.

마키아벨리적 이승만

이승만은 자존심이 세고 완고하며 독선적으로 전 생애를 통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저버린 적이 없다. 그는 포용력이 부족하여 사람과 한번 틀어지면 영원히 등지고 말았다.

이 대통령의 지도력은 마키아벨리적 성향을 보여주는데, 선거에서 진심과 달리 출마하지 않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이중 행위가 빈번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56년 대통령 선거 출마와 관련된 ‘우의마의(牛意馬意)’ 소동이다. 그의 마키아벨리적 지도력은 52년 발췌개헌안 국회통과 때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포장하였지만,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청년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을 규탄하고 국회해산을 주장하는 관제 데모를 일으켰다. 결국 공비 토벌을 빌미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강압적 분위기에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규정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교도적 통치자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은 사적으로 아래 사람이나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정을 주고 관심을 보인 소박한 면도 있었지만, 집권이 길어질수록 권위주의화된 가부장적 인간관계를 보여주었다. 비서실장 이후락은 ‘대통령을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敎)를 신앙하는 기분’으로 일할 것을 강조하였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를 ‘이 나라 이 겨레 구원자 되신 임’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몹시 독한 데가 있었’지만, 소심한 성격으로서 대통령 재직 시 화를 낼 때 손을 덜덜 떨며 담배를 피우기도 하였다. 박정희 지도력의 특징은 꼼꼼한 메모와 현장검증으로, 연설문을 꼼꼼히 챙겼고 경제개발계획을 스스로 기안하고 집행을 지시 감독하였다. 그러나 권력기반이 강화되고 정책 추진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권위주의적 국가운영이 심화되었으며, 권력운영에서 주요 부하들과 권력기관 사이에 분할과 상호견제를 활용하였다.

군부와 힘에 의존한 전두환 노태우

전두환 대통령에게 정치는 힘의 논리였고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도권의 중요성과 힘의 과시를 강조하였다. 그는 취임 초부터 안보 군사 문제에 대해 최고의 전략가로 자부하였으나 경제정책은 ‘시간과 정력의 80%를 쏟은 경제공부’ 후 임기 후반에야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전두환의 지도력 행사는 정권의 정통성 부재로 인해 강압적이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권력기반은 군부였지만 재임기간 동안 권력기관 사이에 위상 변화가 있었다. 집권 초 권력은 청와대 비서실의 소위 ‘3허 씨’ 등을 중심으로 행사되었지만, 80년대 중반이후 장세동이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으로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중요정책 결정과정에서 소수의 측근들이 전두환의 판단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우유부단하다는 비판과 여론을 수렴하는 인내형 지도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그는 집권 초 국민의 지지와 여론에 많은 신경을 쓰기도 하였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이 점증하자 힘에 의존하면서 기무사나 안기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권력기관의 조직적 힘을 이용한 통치는 90년 3당 합당으로 더욱 뒷받침되었으며, 특히 그는 레임덕 현상을 맞이한 첫 대통령으로서 권력누수 방지를 위해 권력기관을 활용하였다.

더딘 민주화, 권위주의 잔재 여전한 김영삼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의 지도력은 민주화 추진에 적합하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었지만 권위주의적 정책결정과 하향식·권위주의적 통치양식으로 신권위주의 논란을 야기하였다. 민주주의는 지방자치단체장 직선 등으로 진전되었지만, 실제로 청와대의 지시와 독주가 행정부 국회 여당 관계를 지배하였다. 군통수권 확립을 위한 군 개혁은 군의 탈정치화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지만 97년 말 환란(煥亂)은 그에 대한 평가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였다.

김대중 대통령도 집권 초 정치개혁을 내걸었으나 고비용 정치구조와 지역분할구도의 해소를 위한 정당·정치개혁의 핵심 과제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는 2000년 6월 국회의 임명 동의가 필요한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등 23인의 주요 인사에 대한 국회인사청문회법 도입 등 절차적 민주주의 확대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지만, 여소야대라는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단기적인 정계개편에 치중하였다. 그의 시대에도 정보기관에 의한 불법 도청 등 비민주적인 정치관행이 계속되었다. 남북긴장을 완화한 2000년 6월 남북정상 회담은 대북 불법자금 송금 시비를 일으켰다.

명암 엇갈린 탈권위주의 실험, 노무현

대통령이 되기 전 노무현은 리더십의 핵심으로 ‘리더의 자질과 능력’, ‘설득력에 바탕을 둔 리더의 힘’ 등을 강조하였다. 노 대통령의 언행은 취임 초인 2003년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와 같이 파격적이었다. 결국 2004년 “국민들이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발언으로 탄핵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낮은 지지는 정책적 실패보다 대통령으로서 부적절한 언행이 야기한 면이 더 컸다.

한 때 그는 이해찬 국무총리에게 힘을 실어주어 국내정치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도록 하였지만 실제로 총리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법적 장치를 보완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2003년 국가정보원장 국세청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2005년 전 국무위원까지 인사청문회를 실시하도록 하였지만, 대통령의 인사에 대한 거부권이 국회에 없어 형식적인 청문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소위 권력기관을 정치적 목적으로 행사하지 않겠다고 한 것과 운영상 문제가 있었지만 당과 청와대의 분리 등은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강로 전주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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