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3월 2007-03-01   807

달의 이야기

新 젊은 날의 초상!

아버지가 밥 알갱이를 입으로 밀어넣었다. “싫어요.” 딸은 밥알을 뱉어냈다. 아버지는 딸이 좋아하는 흰살 생선전을 내밀었다. “싫어요, 아빠.” 아버지가 울었다. 눈물방울은 물줄기가 되더니, 이내 바다가 됐다. 딸은 아버지 눈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시계가 새벽 네 시 언저리에서 재깍거렸다. 꿈이었다. 꿈에 눌려, 딸의 몸은 자꾸 가라앉았다. 며칠 전부터 아버지, 폐암 말기 아버지, 병원에서도 퇴원시킨 아버지가 꿈길을 밟아 딸을 찾았다. 천막 안에 음식이라곤 마실 물 뿐이었다.

딸은 배가 고팠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달을 올려다보며 딸은 울었다. 서른세 살, 딸은 노동자였다. 하청노동자였다. 공장에서 3년 일하며 자동차 범퍼를 조립했다. 공장은 대기업 자동차회사의 하청업체였다. 1차도, 2차도 아닌, 3차 하청이다. 딸은 1차도, 2차도 아닌, 3차 하청노동자였다. 딸은 입사 첫해 2차, 3차란 게 있는 줄도 몰랐다. 딸은 자기도 1차인 줄 알았다. 딸의 기본급은 69만6천800원이었다. 철야 두 번하고 잔업을 모두 해도, 세금 떼면 실수령액 90만원이 채 안 됐다.

딸은 공장 언니들과 ‘라인’을 멈췄다. 빵 때문이었다. 3차 하청이라고, 잔업 노동자들에게 나오는 빵이 안 나왔다. 누군가 ‘눈물의 빵’이란 글을 썼고, 돌려 읽던 노동자들은 모두 울었다. 빵 한 조각에 실린 차별이 서러웠다.

딸과 동료 노동자들은 사상 첫 단체 교섭을 시도했다. 평소 원하청 관계를 부정하던 대기업이 몸소 나서 노동자들의 간담회를 봉쇄했다. 폭력이 행사됐고, 도망치던 여성노동자들은 머리채가 붙잡혀 끌려 나갔다. 해고 여섯 명, 정직 다섯 명, 감봉 여덟 명이었다. 여섯 명 해고자 중에 딸이 포함됐다.

딸은 농성천막을 쳤고, 단식을 시작했다. 정규직 노조 사무실 앞이었다. 한국사회에서 ‘파워풀’하기로 이름난 노조였다. 그곳에 천막을 치면 기업에서도 함부로 천막을 철거할 수 없을 거라 믿었다. 정확했다. 기업은 천막을 걷지 못했다. 대신 정규직 노조 상근자가 찾아와 말했다. “지금 우리 압박하는 건가?” 농성장을 옮겼다. 오토바이 주차대 위에 천막을 얹었다. 며칠 뒤 노조 대의원들이 찾아왔다.

“노동자들이 오토바이 세울 데가 없다며 옮겨주길 원한다.”

일상은 평화로웠다. 아침엔 해가 뜨고, 저녁엔 해가 졌다. 사람들은 출근을 했고, 또 퇴근을 했다. 일상이 파괴된 천막 안으로 일상의 소리가 파고들었다. 공장 기계는 쉴 새 없이 소란스러웠고, 오토바이와 자전거 바퀴는 무심코 바닥을 긁었다. 다만, 전에 없이 비가 자주 왔다.

몸이 새털같이 말라갔다. 55킬로그램에서 44킬로그램까지, 빠지고 또 빠졌다. 뼈만 남았고, 몸이 배겼다. 화장실을 오가며 딸은 신발을 끌었다. 신발 끄는 소리에 사람들이 쳐다봤다. 딸은 자존심이 상했다. 사뿐사뿐 걸으려 했지만 안 됐다. 삼겹살 꼬지, 재료, 삼겹살, 깻잎, 소금, 후추, 양념장, 고추장, 물엿, 마늘, 삼겹살에, 소금, 후추로, 밑간을, 한다….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이 소개하는 음식 조리법을 한 자 한 자 노트에 받아 적었다.

딸에겐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 직영노동자였고, 천막에 찾아와서 이것저것 챙겼다. 남자에게 회사 감시가 붙었다. 퇴근하는 걸 붙잡아 가방도 뒤졌다. 어느 날 그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나한테 무슨 일 생기더라도 마음 아파하지 마.”

딸은 헤어지자는 말로 알아들었다. 답신을 보냈다. “잘 살아.” 그를, 딸은 이해했다.

매일 아침, 딸은 천막 안에 돋은 한 포기 잡초를 바라보며 눈을 떴다. 딸의 ‘화단’이었다. 시멘트 바닥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풀을 보며, 딸도 한 호흡 가다듬었다. 전에 없이, 전에 없이, 다만 비가 자주 오는 날들에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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