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3월 2013-03-08   1953

[특집] 인간의 조건 – 한국에서 이주 여성으로 살아가기

인간의 조건

한국에서 이주 여성으로 살아가기

 

 

최핀키 영어 강사

 

 

외국에서 사는 꿈

 

저는 1973년 9월 14일에 필리핀의 누에바 에크야 주 산호세 시에서 1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평범한 가정이었으며 부자는 아니었지만 행복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였지만,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약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분이 외국인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는 모임에 입회를 권유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외국에 나가 사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여 모임에 가입하였습니다. 그 때가 1995년 8월이었으며, 1996년 1월에 그 모임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국제결혼에 필요한 절차를 밟았고, 제 서류가 한국 대사관에서 통과되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저는 즉시 남편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 때가 10월이었는데 한국에 도착하니 날씨가 무척 추웠습니다. 남편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전북 부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 끝에 도착한 집에서 우리를 손꼽아 기다리시던 어머님과 첫 대면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두 팔을 벌려 저를 반겨 주셨고 저를 만나 무척 행복하신 것 같았습니다.

 

일러스트 황진주

 

 

한국 농촌에서의 생활

 

가족과 처음으로 멀리 떨어져 살게 된 저는 향수병을 이기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특히 밤이 견디기 가장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어머니와 남편은 제게 추수 일을 거들라 하셨는데, 필리핀에서는 해본 적도 없고, 날씨도 추워서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 해 11월 24일 한국에서의 결혼식을 했는데 필리핀에서와 달리 제 친정 식구들은 한 명도 없이 혼자 치르게 되어 너무 슬펐습니다.

결혼식 이후 어느 날부터인지 이유도 알 수 없이 어머니의 태도가 변하여 저를 예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집안일을 열심히 했고, 청소와 소 여물 먹이기, 개 밥 주기, 그리고 요리까지 다 했습니다. 그런데도 한 겨울에 어머니께서는 옷을 빨 때 세탁기를 쓰지 못 하게 하셨습니다. 차가운 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하는 게 얼마나 힘들던지……. 어머니가 말씀하시면 뭐든 순종하고 하루 종일 일을 하였지만 여전히 저를 예쁘게 보지 않으셔서 점점 슬퍼졌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제게 너무나 잘해줬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잘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남편과 저는 분가를 결심하고 남편이 김제에 있는 직장에 들어가면서 어머니 집에서 나왔습니다.

 

 

남편의 죽음과 워킹맘으로 살아가기

 

김제에서의 생활은 너무 행복했고 아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저와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점점 좋아졌습니다. 딸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남편은 폐암 선고를 받았고 둘째가 백일 밖에 안 되었을 때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아픈 순간이었습니다. 한 순간도 남편과의 생활이 그렇게 짧게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를 혼자 키우려면 일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 유치원에서 영어 교사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일, 두 아이 양육, 교사 일까지 다 해내는 것이 힘들어 필리핀에 계신 친정 어머니를 모셔오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비자를 받는 게 까다로워 여러 차례 거절 당했지만, 어머니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었기에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어머니가 초청 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비자 연장을 위해 여러 차례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아이들을 돌보아주셨습니다. 저는 그 덕분에 유아와 초등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영어 강사 교육도 받고 몇 곳의 학원, 유치원 등에서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워 왔습니다.

 

 

두 번째 결혼, 세 아이의 엄마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아빠의 빈자리를 더 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1학년 숙제조차도 제가 잘 도와줄 수가 없어서 정읍에 사는 아이들 이모부에게 자주 전화로 물어보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이주 여성인 저는 아이들 숙제조차 도와주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보다 두 살 위인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저를 좋아하게 되었고 고민을 많이 한 끝에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처음에 시어머니께서는 아이들 없이 저만 시집을 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이들 없이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와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그의 설득으로 시부모님께서 결혼을 허락하셨고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두 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빠가 되어 주었습니다. 혼자서 힘들었던 많은 부분을 남편이 채워주어서  많이 행복했습니다. 결혼 후 바로 임신을 하게 됐는데 둘째를 낳은 지 10년 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좋지 않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교사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도 고생을 많이 하여 남편은 딸 셋만 잘 키우자고 다시는 아이를 갖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바라며

 

저는 작년부터 군장대의 아동복지학과 야간반을 다니고 있습니다. 이주 여성들과 다문화 가정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저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도 싶지만 저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문화 가정들도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한국 사회가 진정한 다문화 사회가 되기 위해서 이주 여성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보아주기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최핀키 1973년 필리핀에서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하고 1996년 전북 부안으로 시집을 와서 현재 영어 강사로 일하며 남편과 세 딸과 살고 있습니다.

 

 

월간 참여사회 2013. 3월호 [특집] 인간의 조건
김 대리 격문
엄마는 신神이 아니다
인간적인 상담을 하고 싶다
5년차 직딩 채식인의 하루
한국에서 이주 여성으로 살아가기
YOUNG-OLD한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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