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10월 2005-10-01   1390

세상의 아픔을 대신하는 삶 최병수 화백

최병수. 그는 미술가이다. 그의 작품은 화랑에만 걸려있지 않다. 새만금 살리기 운동이 한창인 변산반도 들머리 해창 갯벌부터 이라크 전쟁의 책임을 묻는 국제 법정이 열리는 터키 이스탄불까지.

그래서 우리는 그를 현장 미술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에게 처음 붙은 타이틀은 관제(管制)화가이다. 그 사연부터 들어보았다.

경찰이 강요한 스무 번째 직업, 화가

수채화 물감조차 써본 적이 없는, 초등학교 시절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본 것이 유일한 경험이었던 그가 화가가 된 것은 민중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던 정릉벽화사건 때문이다. 민중미술진영의 벽화운동이 한창이었던 1980년대 중반, 미대를 다니던 친구가 벽화를 그리러 간다며 목수였던 그에게 사다리를 부탁했다. 벽화를 그릴 벽의 높이는 겨우 3m. 사다리 대신 받침대를 짜 준 뒤에 할 일이 없었던 그는 친구와 “왜 진달래를 그려?” “봄에 피니까.” “야, 봄에 진달래만 피냐? 개나리도 있잖아.” 식의 싱거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민중운동에서 진달래가 의미하는 바를 알 리 만무한 그의 시답잖은 참견을 귀찮아하던 친구는 “그럼, 네가 그려봐.” 하며 붓을 건네주었다.

그 덕에 그는 개나리 꽃잎을 몇 점 그렸다. 벽화를 끝마치기도 전에 경찰이 들이닥쳤고 그는 끌려갔다. 그림 그리다 잡혀왔기 때문에 직업이 반드시 화가여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형사의 등쌀에 그는 목수에서 화가가 되었다.

중국집 배달원, 보일러 기술자, 용접공 등에 이어 억지로 스무 번째 직업을 얻음으로써 그는 한 우물을 파지 못한다는 주변의 타박을 받아야 했지만, ‘대학 가서 미팅 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라고 선택을 강요하는 천박한 사회에 근본적인 문제를 던지는 예술가 한 명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몸은 부자유스러웠지만 단순 절도범부터 양심수에 이르기까지 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수많은 감방 동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는 전과자들의 얘기가 진실인 경우가 있다. 그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그린 그림 속의 진달래 숫자가 열사들의 숫자와 같다고, 풀이 제복 색깔과 같기 때문에 전경이라고, 태극기에서 붉은 부분이 더 큰 이유는 북한 체제가 우월하다는 걸 선동하는 것이라고 우겨대며” 그림 한 점을 두고 코미디를 능가하는 기가 막힌 취조를 해대는 형사들과 아직도 이름을 잊지 못하는 검사의 심문. 도대체 왜들 그러는지 의문을 갖게 된 그는 서점으로 달려가 인혁당 사건 같은 역사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진실의 일단과 만나게 된다.

“지금 이런 세상이구나 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그런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풀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 때부터 왜 사람들이 싸우나 그런 것들을 알아보려 했지요. 6개월 정도 고민 하니까 사회가 종합적으로 보이더라구요. 이 사회를 종합병원이라는 세탁기에 집어넣었다가 빼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6개월 동안 많은 책들을 섭렵하며 나름대로 고민을 일군 결과 그는 머릿속의 혼돈을 끝내고 ‘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제가 원래 비켜 가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여러 가지 운동의 수단 중 미술을 선택한 것은 비록 그가 제도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 나이까지 ‘캔버스’와 ‘캠퍼스’를 구별하지 못했지만, 네모난 사과상자를 세워놓은 듯 한 초등학교의 미학구조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할 정도의 뛰어난 미적 감각과 아주 어려서부터 분필을 훔쳐다 장승을 만들며 놀았던 자신만의 훈련과정 덕분이다.

‘종합병원’ 사회에 맞게 작업해요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기억하지 못하기는 쉽지 않다. 시위 진압대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군을 그린 <한열이를 살려내라>, 87년 6월 항쟁의 분수령이었던 시청 앞 광장 시위를 선도했던 <이한열 영정>, 노동자들의 장엄한 투쟁을 화폭에 옮긴 <노동해방도>, 분단과 탐욕을 넘어선 새로운 사회를 꿈꾼 <장산곶 매>같은 대형 걸개그림들은 민주화를 향해 달려가던 80년대 후반 우리 곁을 항상 지키고 있었다. 최근에는 김선일 씨의 모습을 그린 <살고 싶다>, 미군 폭격에 손자를 잃은 이라크 할아버지의 통곡을 담은 <너의 몸이 꽃이 되어> 등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평화를 호소하고 있다. 또한 새만금 갯벌에 생명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며 세운 ‘장승’과 지구 온난화에 의해 파괴되는 생태계를 상징한 ‘얼음펭귄’ 등의 작품을 통해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여러 가지 하냐 그러는데요, 우리 사회가 종합병원인데 머리 아픈데 무좀약 발라봐야 소용없잖아요. 적합하게 해야지. 판화가 맞으면 판화를 하고, 콜라주가 맞으면 콜라주를 하는 거지. 얼음을 깨야 하면 얼음을 깨고. 또 크게만 그린다고 하는데 작은 것도 많아요. 수도꼭지에 전구를 단 <빛물>이나 쑥, 명아주를 등받이로 한 작은 의자들, 그런 생활 속의 작품들도 하고.”

종합병원 같은 우리 사회에 대한 그의 경고는 95년부터 작업한 <성장한 야만> 시리즈로 집대성될 듯싶다.

“난 방정식은 몰라요. 근데 더하기 빼기 이런 수준에서 보더라도 이런 시스템은 망하겠더라구요. 망하게 되어 있다니까”

‘벽’을 넘기까지 계속 행동하리라

그는 아프다. 위암 3기 판정을 받고 위 절제술을 받은 뒤 강화도에서 투병중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환자 같지 않다. 다른 점이래야 잡곡밥을 따로 챙겨먹는 것 정도다. 검은 피를 토하던 와중에서도 북한산 관통도로 반대투쟁을 위해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인간방패’가 되어 이라크에 발을 내디뎠던 것처럼 여전히 그는 ‘직접행동’중이다.

“카트리나, 그게 우리 현실이에요. 파괴의 속도가 너무 빨라요. 문명이 이렇게 잔인하게 끝나는 건 너무 쪽팔리잖아요. 온난화 같은 자연의 위기보다 오일쇼크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회, 휴머니즘 믿음 진실 이런 것들은 문자로만 남아 있는 사회. 행동할 수 밖에 없어요. 뭔가를 안하고 있으면 스트레스를 너무 받는 거야. 암까지 얻었으니 더 열 받잖아.”

그는 종말을 설계하는 자들에게 준엄하게 경고하면서 지구를 구할 반지의 주인을 찾기 위해 계속 분투중인 것이다. 요양에 신경 쓰라는 말에는 한마디 대꾸도 않은 채 “야만을 벌하라”는 의지로 충천한 그는 자기 고백대로 “벽을 넘기 전까지는 안정을 찾기 어렵겠다” 싶다.

예쁜 그림 그리고픈 소망 간직한 자연인

내년이면 그도 미술인생 20년을 맞이한다. 가장 시급한 계획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총화한 <성장한 야만> 시리즈를 완성하는 것과 그 동안의 작품을 한데 모은 책을 내는 것이다. 그 다음엔? 뜻밖에도 예쁜 그림을 그리고 싶단다.

“백 년도 안 되는 인생, 아귀다툼 더 이상 못 보겠어요.” 벽 한쪽에 어지러이 붙어 있는 북두칠성을 품고 있는 돼지나 별을 쪼아 먹는 닭들이 그가 그리고 싶은 예쁜 그림일까.

강화도의 그의 집은 닫힌 곳이 없다. 모든 문이 활짝 젖혀져 있다. 문짝을 아예 뜯어놓기까지 했다. 하여 그의 살림집은 멀리 보이는 마니산과 튼실한 알곡을 달고 있는 벼들과 분간이 가지 않는다. 집안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조롱박과 수세미들,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세간들은 그의 작품들 틈에 어지러이 섞여 있다. 어느 것이 자연의 작품이고 사람의 작품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 집의 주인도 그렇게 자연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처마까지 들이치는 빗발에 젖어드는 신발을 연신 휴지로 훔쳐내는 나와 달리 무섭게 퍼붓는 장대비 속에서도 유유자적한 그를 보면 비 오면 우산 쓰는 동물이 사람밖에 없다는 진실이 새삼 아프게 다가온다. 최병수, 그는 자연과 하나이다.

박영선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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