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환율과 삶의 “환율”

화폐의 환율과 삶의 “환율”


어줍은대로 “비교문화”라는 생소한 동네의 연구원 노릇을 했던 경력 탓인지도 모른다. 화폐가 아닌, 다른 가치들의 비교라는 맥락에서, “환율”이라는 낱말이 자꾸만 머리에 못박혀드는 작금이다.

낱말의 지배는, 지배의 속성을 갖기는 마찬가지인가. 한 번 휘어잡고 나면 좀처럼 해방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 때문일 터이다. 요즈음 나는 이 자리 저 자리에서 심상치 않은 제멋대로의 “환율론”을 떠벌리고 다닌다. “재방송”을 들어야 하는 이들에겐 한없이 송구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어쩔 수 없이 병처럼 떠벌려댄다.

당연히 동기가 없을 턱은 없다. 가령 엔화의 환율이 치솟던 무렵에도, 침략마저 부인하는 목소리들로 말미암아, 일본이 갖는 정의의 “환율”은 바닥 장세를 헤매는 것으로만 믿었다. 오히려 엔화의 환율이 떨어져가면서, 무라야마 총리가 내놓은 반성과 사죄의 성명은 그 나름대로 저들이 갖는 정의의 “환율”을 조금은 높여주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더욱 절박한 동기는 밖이 아닌 우리의 안쪽에서 타올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 밖을 향해서는 곧잘 정의의 삿대질을 퍼부어대면서도, 이 땅의 권력은 스스로 정의의 희생을 억누른다. 스스로 부정의의 확산에 가세한다.

그 표본이 바로 12·12와 5·18 가해자에 대한 불기소다. 심지어 이 땅의 권력은 “성공한 쿠데타”는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폭언”마저 서슴지 않는다.

‘우리의 학생들에게 그렇게는 가르칠 수 없다’는 선생님들의 함성도 모기소리로 치부된다.

참담하게도 정의와 언론의 “환율”이 바닥 장세임을 거듭 확인케 하는 사태들은 끝없이 이어진다. 거의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5·18 불기소에 항의하던 우리의 아들은 경찰의 최루탄에 눈을 잃는다. 카메라를 들이대던 기자들은 구둣발 아래 짓밟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거대언론은, 경찰의 부상만을 태연히 강조한다. 정의와 언론의 “환율”과 함께 민주주의의 “환율”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풍경들이다.

8·15의 사면에도 “사기”라는 삿대질이 빗발친다. 사실 양심수의 사면은 “끼워넣기”에 불과하다. “구색맞춤”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형 부패의 주범들이 사면의 주류다. 오죽하면 현직의 검사마저 사면의 부정의에 항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가. 그나마 그의 항변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역사의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법의 지배”에도 “환율”은 있게 마련인가.

무참할 수밖에 없는 “환율”의 발상은, 민망함도 외면한 채 줄줄이 이어진다. 발상이 짓궂어서가 아니라, 사태가 발상을 부추기는 것이다. 경기 여자기술학원에서는 서른 일곱이나 되는 우리의 꽃다운 딸들이 숨져갔다. 무슨 일이 터졌다 하면 떼죽음이다. 인명의 “환율”, 삶과 죽음의 “환율”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른다. 뼈저림 속에서 떠오른다.

반환점에 들어섰다는 김영삼 정권 아래서만 하더라도, 차마 눈을 뜰 수 없는 떼죽음은 이어진다. 구포 열차사고(78),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44), 서해 훼리호 침몰(292), 성수대교 붕괴(32), 충주호 유람선 화재(29), 아현동 가스 폭발(12),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101), 그리고 아직도 “500여명”이라는 어림수만 헤아려지는 삼풍백화점 붕괴…눈이 시려오는 탓으로 괄호 안에 묶어둘 수밖에 없는 죽음의 숫자들 앞에서 누군들 고개를 들 수 있는가. 인명의 “환율”을 떠올리는 뼈저린 발상에, 누군들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마침내 이번엔 경기 여자기술학원의 떼죽음이라고 한다.그 떼죽음은 이 땅이 갖는 복지의 “환율”을 실감케 한다. 명색이 복지시설이라는 학원은, 살상 감금의 수용소였던 것이다. 그 감금의 창살로 말미암아 우리의 꽃다운 딸들은 죽음의 수렁으로 떨어져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의 어른들이 감히 입에 올리는 복지의 실체다! 복지의 “환율”이다!

굳이 “마침내”라고 말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그 하나는 소망의 “마침내”이다. 없어야 할 떼죽음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통한의 “마침내”이다. 없어야 할 떼죽음은 “마침내” 복지를 내건 학원의 마당에까지 덮쳐들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화폐의 환율 정도가 그나마 제값을 챙기고 있을 뿐, 다른 가치의 “환율”들은 총체적으로 바닥 장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총체적 부실”이란 비단 가시적 축조물에만 한정되는 낱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들뜬 어른들은 “선진국” 타령을 늘어놓는다. 참으로 한심함을 넘어 분노마저 자아내는 언술이다.

사회운동 또는 신사회운동 그리고 시민운동의 역량은 이제 그 착각과 환상의 파괴에 쏠려야 한다. 한 사회가 갖는 기능과 역할과 가치의 “환율”들을 똑바로 깨닫는 작업에서부터 새로운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설계와 새로운 건축에 참여해야 한다. 참여의 압력을 가중해야 한다.

답답할 수밖에 없는 나는 요즈음 사회학의 낡은 교과서를 뒤적여본다. 그 가운데서 매키버를 만나기도 한다. 그는 사회집단의 생활과정을 네 가닥으로 구분한다. “적응”과 “목표달성” 그리고 “통합”과 “잠재(Latency)”가 그것이다.

그의 문법을 따른다면, 자연과 인물의 “적응”이 옳지 않았으므로 삶의 “환율”은 높아지지 않는다. 죽음의 “환율”이 높아진다. “목표”의 설정과 “달성”의 방법이 그릇되었으므로 대교와 백화점이 무너진다. 가스는 폭발하고 꽃다운 목숨들이 떨어져간다. 따라서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복지와 수용소의 혼란은 “통합”의 요원함을 반증하는 극치의 보기가 될 것도 같다.

“잠재”는 또 어떠한가. 매키버가 말하는 “잠재”란 가치규범의 창조이며 유지이다. “적응”과 “목표달성”과 “통합”을 지탱하는 바탕이 “잠재”인 셈이다. 오늘의 나에겐 이 땅의 “잠재”를 재어 볼 만한 기력이 없다. 그저 눈을 감고 싶을 따름이다.

매키버의 지표들은 운동의 지평과 지향을 일깨워주는 것도 같다. 그 지표들의 “환율”이 높아져야만 나라와 겨레의 “환율”도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지표들은 삶의 현장에 연결하고, 또한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되는 그 지표들을 제대로 가꾸어 낼 때, 운동은 그야말로 산 운동이 될 터이다.

김중배 참여연대 공동대표 겸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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