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2월 2013-02-15   1785

[특집] 왜 공부하는가

특집

시민, 공부하다

 

특집
왜 공부하는가

시민,
왜 공부하려
하는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대학 내에서 인문학이 존폐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대학 밖에서는 인문학 관련 강좌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구조조정의 물결 속에서 각 대학 인문학 관련 학과들은 폐과 위기에 놓이고 입학 때부터 취직을 걱정해야 하는 대학생들은 인문학 강좌들을 외면한다.
특히 인문학의 위기를 절감하고 있는 곳은 대학원의 인문학 관련학과. 서울대 서양사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은 3년째 자리가 비어 있고 석사과정도 정원을 채우지 못한다. 학부제를 시행하고 있는 대학에서 철학과나 역사학과 등에 지원자가 적은 것도 심각한 상황이다. 덕성여대의 경우 인문사회과학부 7백여 명 중 철학과 지망생은 단 1명이다.
그러나 대학 밖에서는 인문학 관련 강좌들이 교양에서부터 대학원 수준까지 다양하게 개설되며 수강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문예아카데미’, 참여연대의 ‘참여사회아카데미’, 철학문화연구소의 ‘사랑방 철학강좌’, 작가 김정환이 주도하는 ‘한국문학학교’, 서울사회과학연구소와 몇몇 소장학자들이 운영하는 ‘수유연구실’ 등이 대표적.”
<동아일보> 1999년 9월 21일자에 실린 기사 ‘인문학 대학선 울고 밖에선 웃고’의 일부이다. 당시 김상봉, 이정우, 양운덕 등 스타급 ‘재야 철학자’는 독자적으로 강의실을 빌려 강좌를 열기도 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대학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처럼 대학 밖의 대학이 갖는 긍정성을 추구한 시도가 없지 않았으나 대학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그런 시도는 무의미했다. 하지만 대학 밖의 인문학은 학제 간의 벽을 허물려는 가로지르기를 꾸준히 시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나중에 문패가 바뀐 ‘수유+너머’. 수유+너머는 교수 되기를 포기한 박사, 즉 ‘교포박’이 주도했지만 지식 생산의 양과 깊이, 그로 인한 사회적 반향은 유수 대학을 능가했다.
이제 대학 밖의 인문학은 범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넘쳐난다. ‘수유+너머’는 ‘수유너머 N’, ‘수유너머 R’, ‘수유너머 길’, ‘수유너머 구로’, ‘수유너머 강원’ 등으로 분화했지만 초기의 공동체성은 유지하고 있다. 이밖에도 ‘다중지성의 정원’, ‘아트앤스터디’, ‘대안연구공동체(CAS)’, ‘문지문화원 사이’, ‘푸른역사 아카데미’ 등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 위기에 처한 한국의 인문학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인문학을 통해 자아성찰 하는 시민
이들 강의의 일부는 온라인으로도 제공되고 있다. 또 기술(Technology),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디자인(Design) 분야에서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생각’을 나눈다는 자선 개념의  강의에서 출발한 테드TED와 테드 형식의 한국형 미니 프리젠테이션 강연 프로그램인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약칭 ‘세바시’), 대학이 운영하는 온라인 개방 학습 프로그램인 오픈코스웨어(OpenCourseWare·OCW) 등도 급속도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
한편, 저자와 독자가 직접 만나는 북토크쇼가 출판 마케팅의 필수 코스처럼 운영되기 시작했다.
‘인문까페 창비’, ‘후마니타스 책다방’, 문학동네의 ‘카페 꼼마’, ‘북카페 자음과 모음’, ‘사계절 책 향기가 나는 집’ 등 출판사가 운영하는 북카페에서는 북토크쇼가 상시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자체 운영 공간이 없는 곳에서는 상상마당 등의 문화 공간에서 북토크쇼를 벌이고 있다. 출판사로서는 매체의 다양화로 광고와 홍보 등을 통한 프로모션 효과가 떨어지면서 독자와 좀 더 긴밀하게 소통하고 충성스러운 독자를 확보하고자 이런 행사를 기획한 것인데, 시민이나 독자로서는 이만한 인문학 공부의 자리를 만나기 어렵다.
작년 대선에서 박근혜 당선인이 차기 대통령으로 확정되자 한홍구의 『대한민국사』와 『지금 이 순간의 역사』, 서중석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등 한국 현대사 입문서가 약속이나 한 듯 판매 부수가 폭등했다. “책을 구입하는 계층은 주로 2030 세대의 여성으로,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인혁당 사건’이나 ‘정수장학회’ 등의 문제의 실체와 역사적 맥락이 궁금했던 게 구매 동기”라는 분석이 나왔다.
대선 이후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이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영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를 비롯한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 문제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을 것 같은 사회 분석서의 판매 부수가 크게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런 흐름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의 저서가 폭발적으로 팔려나간 이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와 정보기술(IT) 혁명이 맞물려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면서 개인은 실존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제 개인은 1등만 살아남기를 강요하는 체제에서 살아남는 방법론 이상으로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사회체제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을 함으로써 근본적인 자아성찰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의 분위기는 그런 흐름이 깊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대학은 더 이상 치열한 사유와 토론을 통해 유의미한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는 학문의 장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인 승자독식의 논리, 몰가치적 능력주의, 물질 숭배가 가장 팽배한 정글이 바로 대학이다. 대학교수들은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세상의 관심과는 유리되어 있기 십상인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급 논문 쓰기에 열을 올린다. 일부 교수들은 대기업이나 국가의 프로젝트를 따지 못해 안달이다. 대학교수들은 철저하게 제 목숨 줄을 유지하면서 자본과 권력만 좇는 집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지금의 2030 세대는 돈과 물질에 질식해 제대로 된 인문학이 기능하지 못하는 대학, 취업 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결과가 결국 취업, 결혼(연애), 출산(육아)를 포기한 ‘3포 세대’나 일자리, 소득, 집, 연애(결혼), 아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6무無 세대’라는 별명이었다.

 

시민이 요구하는 인문학
날이 갈수록 정보가 늘어나는 속도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이런 마당에 갈수록 커지는 지식에 대한 욕구를 채워줄 정보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대학은 몰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몰락한 대학에서 허송세월했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들은 치열한 사유와 열린 토론을 일상화하며 앎과 삶의 일치를 내세우고 접속과 연대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대안연구기관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다. 시대를 외면한 채 전공자끼리만 통하는 난해한 학문이 아닌, 시대를 직시하며 다양한 수준과 방법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인문학을 추구하는 흐름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인간은 검색을 통해 자신이 알고자 하는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정보의 ‘저장’이 아닌 정보의 ‘망각’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인류가 생산한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개인이 자신이 확보할 수 있는 정보 중에서 핵심적 가치만을 빼놓고 나머지는 잊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다.    
이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교양은 기계적 반복 학습으로 얻는 지식이 아니다. 교양이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의 가치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달리 말하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자신의 인생을 합리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의 필요성을 절감한 젊은이들이 책 읽기나 대안 연구 기관에서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전한 숙제는 ‘열공’하고자 하는 시민의 욕구에 맞는 책이나 지속적인 프로그램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점을 시민과의 소통을 꿈꾸는 단체들이 숙고해야 할 것이다.

 

201302_참여사회2월호

교양이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의
가치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한기호
한국출판케팅연구소장. 격주간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와 월간 <학교도서관 저널>의 발행을 주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디지털과 종이책의 행복한 만남』, 『열정시대』, 『디지로그 시대 책의 행방』, 『책은 진화한다』,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베스트셀러 30년』, 『새로운 책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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