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5월 2002-04-28   344

‘하늘나라에선 부디 행복하소서’

고 최옥란 장애인해방운동가를 애도하며


전경의 구둣발에 밟혀 병원으로 실려간 뒤에야 최옥란 씨는 몸 속의 아이가 6개월 째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임신 초기 몸의 이상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으나 병원에서는 임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진단을 믿고 6개월 동안 두 번의 국소마취를 비롯해 여러 가지 약물을 복용해 온 터였다. 장애아가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 앞에서, 고통스런 삶의 기억들은 아기를 맞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0년 겨울, 그는 매서운 추위 속으로 아이를 떠나보냈다.

가난한 장애여성의 힘겨운 세상살이

지난 3월 26일 장애해방운동가 최옥란 씨가 세상을 떠났다. 한달 전 수면제와 과산화수소를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지만 일찍 발견돼 목숨을 건졌었다. 하지만 그는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주변 사람들의 바람을 뒤로하고 고단했던 세상을 훨훨 떠나버렸다. 여성이면서, 가난했고, 장애인이었던 그를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약자’라 말했다. 힘겨운 세상에서 이 모든 굴레를 짊어지고 가기엔 너무나 벅찼다. 아니, 이러한 것들을 굴레로 만들어버리는 이 사회에 너무나 분노했던 그였다.

그는 세 명의 아버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순탄치 않은 가정환경이었고, 가난은 그에게 대학의 꿈을 접게 했다. 뇌성마비 장애인인 그에게는 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 학원에 등록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장애인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게 학원 측의 거부 이유다. 장애인에게 노동은커녕 배움의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 사회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에 절망하고, 사회에 분노하는 동안 그는 어느새 장애해방운동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 그는 1988년 세워진 장애문제 연구소 ‘울림터’의 창립회원이었고, 1990년에는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과 장애인복지법개정을 위한 공대위’ 활동을 펼쳤다. 2001년 2월에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역 선로를 점거해 150만 원의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남편과의 이혼, 그리고 양육권

12월의 바람은 맵찼다. 하지만 겨울 칼바람보다 더 마음을 아프게 에는 것은 힘있는 자들의 침묵이었다. 개인·가구별 특수성을 무시한 정부의 행정편의적 최저생계비 산정은 몸도 가누기 힘든 그녀를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그는 작년 12월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을 벌였다. 남편과 이혼한 뒤 청계천에서 노점을 꾸리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그에게 동사무소로부터 최저생계비 수급권자 자격을 거둬간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수급권을 잃게 되면 의료비 혜택도 받을 수 없게 되어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그는 수급권을 지키기 위해 노점을 접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월 26만 원의 최저생계비로는 도저히 생활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영구임대아파트 임대료와 유지비 16만 원, 의료비 지원품목에서 제외되는 의약품 값이 10만 원 이상 매달 들어가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숨쉬는 것’밖에 없었다. 이처럼 중증장애인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일괄적으로 지급되는 최저생계비를 개선하고,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그는 온몸으로 싸웠다.

장애인에게 너무나 가혹한 현실에 그토록 치열하게 대항했지만, 최옥란 씨 역시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였다. 그에겐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 10살 된 아이가 있다. 남편과 오래 전부터 함께 살다가 96년에 식을 올렸지만 합법적인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 역시 사고로 오른팔의 성장이 멈춘 장애인이었고 함께 장애해방운동을 해 오던 오랜 동지였다. 하지만 결혼생활 중 그는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늘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결국 둘은 이혼을 하게 되었지만 장애인이며, 가난했던 최옥란 씨에게 아이의 양육권이 주어질 리는 만무했다. 최씨에게는 한 달에 한번 아이와의 접견이 허락될 뿐이었다.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도움을 받아 예금통장을 채우려 했다. 하지만 통장이 채워지면 최저생계비 수급권자 자격을 잃게 된다. 수급권과 양육권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녀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었다.

죽어서도 보장받지 못한 이동권

3월 27일 최옥란 씨가 세상을 떠난 지 하루 지나 찾은 서울 한강성심병원에는 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최 씨의 어머니 우한승 씨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답답하다’는 말밖엔 어떤 말도 잇지 못했다. 한구석에는 최 씨의 아들이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최 씨의 영정이 분노도, 슬픔도 지운 채 내려보고 있었다.

애초 장례위원회는 28일 고인이 투쟁을 하며 지났던 길을 밟아, 명동성당을 거쳐 세종문화회관에서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장례차량은 시청에서 경찰에 가로막혔다. ‘그동안 장애인 이동권 연대가 불법행위를 저질러왔고, 이번에 유족을 이용해 불법집회를 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돼 저지했다’는게 경찰의 대답이었다. 살아서 장애인의 이동권을 얻어내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건만 죽어서도 그는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다.

“옥란이가 자살을 기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89년에도 자살을 꾀했던 적이 있었죠. 일 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교육의 기회마저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20대의 여성이 당연히 원하는 행복을 꿈꿀 수 없는 자기 신세를 비관했던 것 같아요.”

최옥란 씨와 절친했던 친구 위문숙 씨(36세·장애인실업센터 사무국장)의 이야기다.

최 씨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중증장애인은 자살하고픈 충동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리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선진국을 처음 가는 사람은 거리에 장애인들이 유난히 많은 것에 놀라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나라들에 장애인이 많은 게 아니다.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설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우리나라의 450만 장애인들이 집안에 갇혀 있는 것일 뿐이다.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하고 있지만, 장애인용 리프트가 갖춰진 곳조차 드물다. 장애인이 쉽게 탈 수 있도록 바닥을 낮춘 저상버스 도입은 꿈에 가깝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해요. 그처럼 고통스러운 삶이었는데, 영혼만은 자유로울 수 있겠죠. 생전에 꿈꾸었던 모든 곳을 갈 수도 있고, 행복한 곳에서 살기를 바래요.”

위씨는 고개를 떨구었다.

한태욱(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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