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5월 2002-04-28   723

일본 풀뿌리 민주주의 현장을 찾아-3

시민감사관의 ‘민주적’공무원 감사

“얼마 전에 우리 시설에 대한 감사가 있었습니다. 보통 감사라고 하면, 시설의 대표가 공무원들을 안내하며 감사에 필요한 서류들을 제출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았어요. 담당 직원들이 평소 일하던 자리에 대기하도록 했고, 저희 시설의 옴부즈만과 가족모임 회원들도 사무실에 대기하고 있었어요. 공무원들은 당연히 이사인 저 외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명령했지요.”

라폴 후지사와 노인복지시설 이사인 오가와 야스코(小川泰子)씨의 얘기를 들으면서 흥미가 동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지요?”

“감사란 것이 누가, 누구를 위해 하는 활동인지에 관한 저의 생각을 얘기했어요. 당신들은 주민들을 대표해서 이곳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당신들이 감사를 하는 목적은 이 시설이 주민들을 위해 올바르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그렇다면, 여기에 참석한 옴부즈만과 가족모임 회원들도 이 시설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 여러분들이 점검하는 과정을 지켜볼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주장은 했지만 사실 속마음은 두근두근 했지요. 그들이 어떻게 나올까 해서요. 옥신각신한 끝에,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귀찮아졌는지, 드디어 감사가 시작됐습니다. 물론 살벌한 분위기였지요.”

옴부즈만과 가족모임의 회원들이 감사를 참관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그의 시도가 신선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흥미롭군요. 학생들과 강의실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하는 기회는 많지만, 민주주의란 것이 이렇게 생동감 있게 다가오기는 오랜만입니다. ‘민주적 감사’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오후가 되자 오전의 살벌하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공무원들과 직원들 사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흐르는 거예요. 감사를 하러 온 공무원들이 이건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더 좋다는 등 오히려 직원들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는 것이에요. 그날의 감사는 오후 4시가 지나 끝났지요. 모두에게 즐겁고 유익한 감사였어요. 이렇게 보람있는 감사는 처음 해본다며 공무원들도 좋아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날 감사에 참석하셨던 분들이 감상문을 써 가지고 와서 다음 주에 함께 토론하는 모임을 가질 예정입니다.”

7만 명의 신뢰

그날의 감동을 떠올리는 듯 50대 중반인 그의 눈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그의 눈물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 달 전 첫 만남에서도 나는 그의 눈물을 보았다. 이번이 감동의 눈물이라면 그때는, 운동가로서의 신념과 고뇌의 샘에서 흘러나온 눈물이었다는 것이 차이일 것이다.

오가와 씨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경력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복지법인 시설 이사로 부임하기 전에, 그는 4년 간 워커즈 콜렉티브(전원이 출자하고 경영에 책임을 지며 몸소 일하는 시민사업체 이하 워커즈)라는 단체의 연합회 이사장으로 있었다. 대개 젊은 시절에는 일선 현장에서 활동을 하다, 50대 이상이 되면 연합회나 연대기구의 이사장으로 옮겨가는 것과는 반대다.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복지시설의 현관에 들어서니, ‘7만 명의 신뢰’라는 글자가 새겨진 초석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장 옆에 놓인 안내장을 보니, 3년에 걸친 운동 끝에 7만 명의 주민들로부터 받은 기부금 1억 엔(한화 약 10억 원)이 이 시설의 재정적 기초가 되었다는 내용이 씌어져 있다. 이 시설은 ‘풀뿌리 복지운동’의 산물인 셈이다. 이곳에 워커즈의 예비군이라 할 수 있는 2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과 복지시설 중에서는 아마도 일본 전국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싶을 옴부즈만 조직이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그를 기다리다가, ‘참여는 참여에 필요한 자질을 발달시키고 길러낸다’는 참여민주주의의 고전적 명제를 떠올려봤다. 그러나 그와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아까의 단상이 자칫하면 평론가적 감상에 그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한 명제가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기까지의 조직적 노력이란 게 얼마나 고된 것인지 가슴 깊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기

먼저 시설의 운영방식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시설의 특징은 고용된 노동자와 워커즈 멤버가 함께 운영의 주체로 참가하고 있는 점입니다. 워커즈는 이 시설을 지역사회복지의 거점으로 만들어주는 핵이지요. 워커즈는 이 곳에서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을 지역사회에서 시민복지사업을 펼 때 활용하고 있어요. 또한 워커즈가 있음으로써 지역사회의 복지정보가 이 시설에 들어오게 되지요. 워커즈로 인해 지역사회의 풀뿌리 복지시스템 속에 저희 시설이 존재하게 되는 셈이에요. 워커즈와 일반 직원들이 공존하는 운영방식을 유지하려는 데는 또 다른 까닭이 있어요. 일본사회 전체로 놓고 보면 이 시설은 조그만 규모일 뿐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공존의 실험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지요. 워커즈가 일본 내에서 더 확대된다면, 워커즈와 같은 노동의 방식이 자본주의적 노동방식과 공존하는데 필요한 제도적 틀을 만들 때 저희들의 실험이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거든요.”

이 단체에는 어떻게 부임하시게 되셨는지요?

“제가 부임하기 전, 워커즈와 고용직 노동자 사이의 불신으로 이곳의 운영이 삐걱거리는 상태였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게 된 것이지요. 제가 부임한 뒤에도 약 2년 간은 고용 노동자들과 워커즈 멤버들 사이의 불신을 해소시키지 못했어요. 워커즈 멤버들은 고용직 노동자들이 하는 일에 비해 너무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고, 고용직 노동자들은 워커즈 멤버들이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무시하는 풍토에 젖어 있었는데, 저의 예상보다도 불신의 골이 깊더군요. 작년에 노동방식의 차이를 뛰어넘어 각자에게 맡겨진 일감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척도를 만드는 공부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이 두 집단간의 불신을 해소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제가 이곳에 부임한 이래 가장 보람있는 일 중의 하나지요.”

이사장 직에서 물러나 일선 현장에 돌아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현장에 다시 돌아와 활동하시는 느낌은 어떤지요?

“사람들 사이의 불신을 해소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지는 몰랐거든요. 그럴 때마다 의논을 하는 분이 있는데, 그 분께서 해주시는 말씀은 한결같아요. 자네가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다는 것이지요.”

그의 첫 번째 눈물을 본 것은, 바로 이 때였다. 원점이라는 말의 뜻을 마음 속에서 곱씹어 보고 있는 듯, 그는 원점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그 말을 듣게 되면 마음이 참 편안해져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분들께 감사할 뿐이지요.”

나일경 메이지가쿠인 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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