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5월 2002-04-28   3200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화해하려면?

“대화와 타협”, “한발짝 씩 양보”….

갈등 분쟁이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얘기다. 노사분규나 집단간 갈등이 터지면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이구동성으로 ‘양보와 타협’을 외친다. 고명하신 학자들은 “타협의 문화가 없다”, “타협할 줄 모르는 민족성…” 운운하며 혀를 찬다.

중재자로 나선 이들은 어떻게든 양측의 요구사항을 절충한 묘책을 찾아내 당사자들을 설득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게 그리 녹록치 않은 법. 끝내는 당사자들의 ‘고집스러움’을 탓하며 두 손들고 물러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왜 그럴까. 흔히 얘기하는 대로 우리에게 타협의 문화가 없기 때문일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타협을 잘하는데 우리만 그렇지 못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타협의 문화가 자리잡혀 있다고 장담하는 나라가 있으면 나오라고 해보라. 흔히 미국이 타협의 문화가 발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노사문제로 장기간 파업이 벌어지고 대량해직 단식투쟁 등 격렬한 양상을 띠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단적인 예가 1994∼95년의 메이저리그 파업사태다. 구단주들과의 연봉협상이 결렬되자 선수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노사 양측의 타협 거부로 파업은 232일이란 초장기 기록을 세우며 지속됐다. 이 때문에 94년 월드시리즈가 취소되고 95년 시즌도 늦어졌다. 이래저래 구단측은 총 10억 달러(약 1조3000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선수들이 입은 피해도 막심했다. 야구사에 길이 남을 개인기록 달성을 눈앞에 두고 분루를 삼켜야 했던 선수들도 적지 않았다.

1981년 8월, 임금인상 근무시간단축 등을 요구하며 미국 전역의 항공 관제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연방공무원의 파업은 불법”이라며 즉각 업무 복귀를 명령했다. 그리고는 타협의 여지도 없이 이틀만에 1만1345명의 항공 관제사들을 전격 해고시켜버렸다. 이에 원한이 맺힌 관제사들은 몇 년 전 의회에서 워싱턴 근교 내셔널 에어포트를 레이건 공항이라 명명키로 하자 극렬 반대하기도 했다.

타협 불가능한 쟁점들

어느 사회에서나 이렇게 타협이 힘든 것은 왜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주된 원인은 분쟁의 쟁점 자체가 근본적으로 타협 불가능한 것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안이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국한된 경우 시장에서 흥정하듯 적당히 타협책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사회의 수많은 갈등분쟁은 물건값 실랑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나 신념 가치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심각한 분쟁이 벌어지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Basic Human Needs)가 억압당할 때다. 학자들마다 견해가 조금씩 다르나, 공통적으로 꼽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안전-안보(security), 정체성(identity), 자결권(self-determination), 존재의 인정(recognition) 등 네 가지다. 이러한 욕구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나가는데 필수적인 것들이다. 그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은 불가피하다.

현재 세계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전쟁의 원인도 이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자결권을 위해 자살공격까지 감행하며 싸우고 있다. 목숨을 던질지언정 양보나 타협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안보나 민족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문제에 대해선 비타협적 태도로 일관한다. 미국은 타협을 종용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정교한 문제해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해법을 만들어내야만 이 분쟁은 그치게 될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관련된 분쟁은 우리 주위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쓰레기매립장·소각장 등 이른바 ‘혐오시설’을 둘러싼 님비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격렬하게 반대운동을 펼치는 주민들에 대해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는 “보다 많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한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한다. 일부 그런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아무리 공익시설이라지만 그로 인해 자신들의 생명-재산의 안전이 위협받게 됐는데 반발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민들을 더욱 분개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일부 공무원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이려 한다는 사실이다. 주민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결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싸우는 주민들에게 “양보와 타협”을 주문하는 것은 가당치 않거니와 너무 가혹한 처사다.

원칙에 기반한 통합적 해결책 만들기

많은 경우 양보가 미덕일 수 있다. 때론 타협이 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미봉책에 그친다. 당장 급한 불은 끄더라도 불씨는 여전히 남아 언젠가 다시 터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타협책을 찾기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르고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양측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윈윈 솔루션’, 상생의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이다.

이 칼럼 첫 회(1월호)에 소개한 “오렌지분쟁”의 경우를 돌이켜보자. 오렌지 하나 가지고 누나와 동생이 서로 갖겠다고 다툴 때 먼저 떠오르는 해결책은? 반씩 나눠 가지라는 타협책이다. 하지만, 누나는 전에 비슷한 상황에서 한번 양보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번엔 동생이 양보할 차례인데 반씩 나누라고 하는 것은 불공평해 받아들일 수가 없다. 동생은 공작재료로 오렌지 껍질 하나가 다 필요하기 때문에 역시 타협책이 안 통한다. 그런 두 남매에게 타협의 중요성을 아무리 설득한들 먹히겠는가. 그 대신, “왜 오렌지 하나를 다 가지려고 하느냐”고 물음으로써 각각의 필요(need)를 충족시키는 해결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시나이반도를 둘러싼 이집트-이스라엘간 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78년 캠프데이비드의 중재석상에서 카터 대통령은 지도에 이리저리 선을 그어가며 양측의 입장을 절충한 묘안을 짜내느라 애썼다. 그러나 양측 정상은 타협을 거부했다. 회담이 실패로 끝나려는 찰나,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진정 원하는 것, 우려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집트는 자국 영토(시나이반도)의 반환을 원하는 반면,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시나이반도 자체가 아니라 안보문제였던 것. 그러자 해결책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되 그곳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안보도 보장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분쟁이 이런 식으로 통합적 해결이 가능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유산분배 등의 경우와 같이 한정된 재화를 놓고 서로 많이 가지려고 다투는 경우도 많다. 이런 때는 상생적 해결이 불가능하니 타협이 최선일까. 그렇지 않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이 모여 어떤 원칙과 기준으로 분배할 것인지 의논하고 분배의 규칙과 절차를 함께 정하는 것이다. 절차가 공정하면 결과도 공정하게 여겨지는 법이다. 자신이 참여해 게임의 룰을 만들었다면 게임의 결과가 혹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받아들이게 된다.

오랜 세월동안 외세와 독재 등 불의에 항거하며 싸워온 우리 민족에겐 특히 타협을 싫어하고 원칙, 지조, 절개를 숭상하는 전통이 강하다. 우리 핏줄 속에는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하다”는 ‘비타협적 투쟁’의 정서가 여전히 흐르고 있다. 민주화가 되고 타도해야 할 ‘적’도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엔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의 문제,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관한 문제로 벌어지는 갈등분쟁이 많다. 어정쩡한 타협보다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통해 갈등분쟁을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이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강영진 미국전문중재인.조지메디슨대학 분쟁해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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