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5년 09월 2015-08-31   871

[정치] ‘아베’와 ‘아이히만’, 그리고 미래세대를 향한 책임

 

‘아베’와 ‘아이히만’, 
그리고 미래세대를 향한 책임

 

 

글. 김만권 정치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존중하여, 정치와 사회를 철학으로 풀어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거리 위의 정치철학자다. 시민들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함께 말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불평등의 패러독스>, <참여의 희망>, <정치가 떠난 자리> 등을 썼다. 

참여사회 2015년 9월호 (통권 226호)

살아남은 자들의 ‘지속되는’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란 짧은 시다. 전쟁이란 고난의 시기에 살아남는 것은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브레히트 시 속의 “나”는 차라리 사정이 나은 편일지 모른다. 살아남았다는 것이 한때는 국가가 숨기려는 비밀이 되고 남성 중심사회가 경멸하는 대상이 된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숨어 지내다가 해방이 되고 40여 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 일본군이 성노예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던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 당사자들이다. 그 지독한 전쟁범죄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행운일지도 모르지만, 이후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행운이 진정한 행운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는 한때 이 할머니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서도 솔직한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 할머니들은 일본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지금도 매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1992년에 시작된, 동일한 사안을 가지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진행되고 있는 집회. 올해로 24년 차에 이른 ‘수요집회’다.

 

가해자들이 희생자들을 향해 느끼는 불편함 
“위안부 문제는 3억 엔이면 해결할 수 있다”고 막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일본의 총리인 아베 신조다. 그는 일본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여론에 떠밀려 전후 70년 만에 소위 ‘아베담화’를 내놓았다. 그 내용은 모두가 담화 이전 짐작했고 이후 확인할 수 있었듯 사죄의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든 밋밋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아베담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또렷한 사실 하나가 있다. 아베는 담화문에서 전후 세대가 인구의 8할이 넘는 지금 “과거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우리들의 아들이나 손자, 그리고 그 앞 세대의 자손들에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 계속 사죄해야 하는 숙명을 짊어지워서는 안 된다”는 일본 내 주류세력으로서의 신념을 피력했다. 전후 70년이 된 지금, 아베 역시 전쟁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세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는 것이냐’는 불편함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죄의 문제와 관련해 희생 당사자도 아닌 어떤 이들은 현시점에서 사죄하는 것에 대한 적절성을 운운하고, 사죄를 계속해야 하는 이들의 자존감을 걱정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의 아이러니는 가해자들의 사과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토록 민감하게 작동하는 감수성이 피해자들이 평생을 느껴야 할 비참함에 대해서는 어이없을 만큼 둔감하게 작동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사죄해야 하는 것일까?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의 끝은 학문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인정된 바에 따르면, 희생자들이 이제 그만 되었다고 할 때까지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문제는 희생자들이 일본의 사죄에 진정성이 없다고 여기는 데 있고, 하여 용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미래세대를 위해’라고 말한 아베와 아이히만
진정한 사과의 말 한 마디 없이 미래세대에게 일본의 과오를 사죄할 책무를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아베를 보며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혐의로 처형된 아돌프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에 의해 체포된 아이히만은, 모사드가 자신을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었음에도 순순히 체포되었다. 아이히만은 도망가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부 독일청년들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이 젊은이들은 자기 아버지들이 한 일에 대해 결백하기 때문이죠.” 아이히만 역시 아베처럼 결백한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이런 아이히만의 결심이 스스로를 의기양양하게 했을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것이 공허한 말에 불과했다”고 단언한다. 아렌트가 볼 때 ‘의무’라는 미명 아래 ‘조건 없이 자신의 보편적 양심에 따라 행위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자신의 양심을 비우고 히틀러의 명령에 조건 없이 복종하는 행위’로 대체시킨 아이히만은 생각하지 못하는 자였고, 그 생각하지 못함의 실체는 반성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반성하지 못하는 인간의 실체는 모순 덩어리이고 그 모순을 일상에서 아무런 부조화도 없이 행하는 데 문제가 있다.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다. 

‘진정한 사과 없이’ 미래세대에게 사죄할 책무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아베의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리고 아베는 이런 신념에 대해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인다. 아이히만은 명령에 복종한 죄로 교수대에 매달렸지만 아베는 한 국가의 총리로서 명령을 내리는 자리에 있다. 게다가 담화 이후 아베의 지지율이 올라간 것을 보면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베뿐만이 아닌듯하다. 미래세대에게 사죄의 책임을 넘기지 않는 유일한 길은 일본정부가 희생자들에게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고히 사죄를 표명하는 것이다. 이런 진정한 사죄만이 살아남은 자들의 ‘지속되는’ 슬픔을 달래고, 사죄의 말조차 듣지 못한 채 죽어간 대다수 희생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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