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1월 2007-01-01   1013

역사의 기록과 진실

주몽, 왕건, 대장금, 불멸의 이순신, 허준, 명성왕후. 주인공들을 시대 순으로 나열해 본 드라마의 제목들이다. 아니 단순한 드라마의 제목이 아니라 방영될 당시 언제나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들이다. 연기자의 연기력과 작가의 구성능력, 그리고 연출자의 연출능력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원인이 이것뿐이었겠는가. 자신의 역사적 뿌리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한국인의 정서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와중에 언제나 사실(史實)과 픽션의 경계선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방송사는 나름대로 실증을 토대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답변한다. 그렇지만 이들 드라마와 관련된 논쟁은 드라마가 보여주는 사실(事實)이 당시와 똑같은 현실일까라는 진실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유발되어, 당대의 역사적 사실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공감대 때문에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록의 부재가 불러오는 혼란

이 글에서 필자는 사실과 픽션의 관계를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방송을 보면서 정말 당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라는 초보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시청자들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실증 곧, 자료적 근거에 대한 궁금증과도 연관이 깊은 의문이다. 더구나 위에서 언급한 방송드라마의 인물들 가운데는 역사적 사실과 드라마상의 픽션의 경계선에 대한 논쟁만이 아니라 대상 인물에 관한 초보적인 수준의 사실논쟁이 학계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왼쪽의 사진 주인공이 명성황후인가 아닌가라는 논쟁을 들 수 있다. 한때 사진 속의 여인은 명성황후라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높은 지위의 궁녀였을 것이라는 반론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의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같으면 아주 기초적인 자료인 국가원수의 부인 사진을 둘러싸고 상반된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개화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명성황후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원인에 대해 여러 주장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 우리 학계에서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명성황후의 사진이 발견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드라마 속의 인물을 둘러싼 진실 공방은 이순신의 죽음에 관해서도 있었다. 가령 ‘불멸의 이순신’은 그동안 악의 화신처럼 묘사되어 왔던 원균과 조국을 구한 이순신이란 대결구도를 재조명한 드라마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드라마가 방송되는 도중에 이순신은 정말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죽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었다. 교과서적인 정설은 ‘노량해전의 와중에 죽었다’이지만, 선조와 조정의 분열 때문에 죽음을 위장했다는 반론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은 이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

이처럼 대단히 사소하고 초보적인 기록일지라도 역사 기록은 과거를 이해하는 안내자이고 현재를 성찰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국가 기록관리의 허점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기록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실천한 사례는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국보 제151호이자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만을 놓고 보아도 알 수 있다. 대의명분과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준엄하게 기록하는 논법을 춘추필법이라고 하는데, 실록은 이 원칙에 충실한 기록물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기록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는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기록물이 조선왕조실록인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실록편찬의 정신을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나간 일이지만, 오늘날 한국인의 삶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이 IMF사태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왜 IMF의 관리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는지, 그 과정은 제대로 규명되어 있지 않다. 진상규명을 시도는 했지만, 그나마 밝혀진 내용조차 국민적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회의록의 부재에 있었다.

IMF관리체제로 빠져든 과정을 알 수 있는 회의록이 없는 현실은 우리의 기록문화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통치권자인 대통령과 관련된 기록물, 예를 들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무대(청와대)의 수석보좌관회의, 또는 국무회의 회의록조차 남아있지 않은 시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인 소유물처럼 갖고 있거나 불리한 기록을 없애는 경우도 있었다. 기록의 부재와 소멸, 사유화는 사실 규명과 함께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듦으로써 우리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과거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현재를 책임지는 의식을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미래 발전을 가로막는다.

조직만이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삶의 경험을 과장하거나 삭제함으로써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진실을 규명하는데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범석의 「우등불」의 경우, 청산리전투를 자기중심적으로 기술함으로써 김좌진 부대와 더불어 전투의 중심 축이었던 홍범도와 그 부대의 활약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청산리전투에서 사망한 독립군과 일본군이 몇 명인지 근거를 갖고 대답할 연구자가 없을 정도로 오늘날까지 진실을 규명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기록이 불충분하다면 기억이라도 정확해야 진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교과서는 청산리전투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면서도 통계숫자를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분단으로 왜곡된 역사인식

국가 기록의 부재와 왜곡된 기억은 남북분단이란 특수상황 때문에 더 확대된 경우도 있다. 1994년 7월 첫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되었을 때, 국내의 일간지들은 김일성의 가계와 성장과정을 크게 보도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때까지 한국사회의 대세였던 ‘가까 김일성론’을 주장하는 기사가 없었다는 점과 북한을 49년 동안 통치하고 있던 그의 약력에 관해 부정확한 기사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김일성이 1929년 동만지구 공산주의청년동맹위 서기를 역임했다(<조선일보>1994.7.9)는 내용은 사료적 근거가 없으며 북한만이 주장하는 약력이다. 남한사회는 남북대화의 상대편 통치권자의 기본 약력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적대적 감정과 배제만이 남북관계의 모든 것을 대표했던 분단시대의 산물이다.

지금은 이 정도는 아니지만, 그들의 활동을 교과서에 언급하고 가르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해석을 강요하며 좌파적이라는 색안경으로 바라보는 시대이다.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만이 아니라 일제강점하 사회주의운동에 관한 서술의 역사적 자리매김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원인의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사에 관한 균형 잡힌 역사인식을 가로막는 집단적 기억의 왜곡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와 평화를 위한 역사인식의 중요성

공식적 성격을 띠는 기억의 왜곡은 구성원 내부의 이해관계와 정체성 문제를 동반하며 사회적 충돌로까지 이어진다. 교과서포럼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이 이를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기억의 왜곡은 국가간 충돌을 동반하기도 한다. 일본 역사교과서의 역사서술문제나 중국의 동북공정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동북아의 역사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세 나라 모두 세계화(국제화)를 내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의 역사 갈등은 국민적 정서를 밑바탕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몇몇 정치가나 역사학자의 판단과 실천에서 근본적인 해결점을 찾을 수 없다.

역사인식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필자는 학창시절에 광해군을 폭군과 패륜아로 배웠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를 중국 대륙에서 명과 청이 교체하는 혼란의 시기에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지혜로운 군주로도 인식하고 있다. 사실은 하나일지 몰라도 진실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역사인식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대화의 출발점 또한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가 일본의 역사교과서문제나 중국의 동북공정문제를 비판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들의 독점적 태도에 있다. 그렇다고 한국사회가 이와 무관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핵심은 독점하려는 언행에는 반드시 다름에 대한 배타성과 차별이 따라다닌다는 점이다. 역사교육과 역사인식의 궁극적인 목적이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데만 두었을 때 초래되는 근본적인 문제점도 이것이다.

다름 속에서도 공존하는 관계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할 때만 성립할 수 있다. 어떻게 역사를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 인류의 평화와 인권을 진정으로 지향하며 향상시킬 수 있는가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어떠한 역사인식이 사회적 민주화를 진척시키고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모색하는 곳에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한국적 길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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