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4월 2002-04-10   691

‘꼭 16강에 들어야 합니까?’

축구와 대한민국식 이상한 민족주의


축구만큼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나게 하는 스포츠도 없을 것이다. 경제난에 허덕이면서도 연일 축구장을 찾아 광적인 응원을 보내는 남미 국가들을 보더라도 그렇고, 통합의 길을 걷고 있는 유럽공동체 안에서도 국제경기 때 훌리건들이 극성을 부리면서 자국을 응원한다.

문화평론가 신현준 씨는 『씨네21』 칼럼을 통해 “국내 경기 때는 텅텅 비다가도 국가대표 경기 때만 가득 차는 관중석을 보고 있으면, 축구를 좋아하다 보니 애국심이 생기는 게 아니라 애국하기 위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며 축구와 관련된 한국의 괴상한 민족주의를 비꼰 바 있다.

물론 우리 축구가 16강에도 들고, 8강, 4강 아니 우승을 하게 되면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성적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인들이 월드컵을 통해 축구실력을 끌어올림은 물론 관광수입을 올리고, 일본을 알리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 가는 모습에 비해 우리는 너무 성적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런 성적지상주의는 광고를 통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한국이 프랑스를 (5: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합니다’라는 한 약품회사의 광고나 ‘4000만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될 때까지 ××텔레콤이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한 통신회사의 광고를 보자. 도대체 어떻게 4000만 국민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엽기적인 광고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의아스럽다.

나는 축구 혐오주의자는 아니며, 재미있는 축구경기를 즐기고, 이왕이면 한국이 경기에서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사람이다. 하지만 4000만 국민 모두를 붉은 악마로 만들겠다는 엽기적인(?) 광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 획일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발상은 ‘민족주의는 역사를 통해 대체로 이성의 반대편에 있었다’는 저널리스트 고종석 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입맛을 쓰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고씨의 지적대로 낭만주의에서 시작해서 전체주의로 끝난 민족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민족이란 말은 너무도 가슴 뭉클하게 남아있다. 이는 오래도록 약소민족으로서 힘센 나라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시달려 온 역사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미국과의 오랜 해방전쟁에서 승리한 뒤 약한 이웃 나라에 패권을 행사한 베트남 민족주의나, 일본사람들에게 당한 모멸감을 잊고 어느덧 외국인 노동자를 학대하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보여주듯, 저항 민족주의가 정복적 또는 공격적 민족주의로 변해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적어도 월드컵과 관련해 우리는 지금 지나치게 승리에만 매달려 있는 듯이 보인다. 어떤 개그맨이 축구열풍을 보며 “이 정도 정성으로 열심히 하면 뭐든 1등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세계에서 16등 하는 걸 목표로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성적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있으면서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핸드볼이나 필드 하키 같은 종목의 경기장이 텅 빈 이유는 무엇일까?

지승호 웹진 ‘시비걸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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