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4월 2002-04-10   762

교육도 벤처투자

교육도 벤처투자


전교조와 교총 등 교원단체는 김대중 정부의 교육정책 기조를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고 7차교육과정, 성과급제, 중초교사 임용, 수습교사제, 체벌금지 등 거의 모든 정책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거기에는 교육은 시장원리를 적용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공적 영역이라는 주장이 늘 따라다닌다.

그렇다. 교육은 시장에 내맡길 수 없는 특수한 영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장원리를 적용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 되는 영역인 것은 결코 아니다. 시장원리를 거부한다는 교원단체들조차도 교육투자니, 교육재정 확보니 하는 경제학 용어를 쓰고 있지 않은가. 교육은 투자다. 학생 개인이나 학부모에게도 그렇고 국가의 시각에서도 그렇다. 투자는 어떤 것이든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편익을 얻기 위한 경제적 선택행위다. 교육투자도 예외가 아니다.

교육투자의 수익률

흔히 학생과 학부모를 교육서비스 수요자라고 한다. 이들이 교육에 투자하는 것은 미래의 정신적 물질적 풍요를 얻는 데 필요한 지적자본(知的資本)을 축적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가계소득의 일부를 현재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 쓰지 않고 등록금, 책값, 학원비, 과외비, 해외연수비, 유학비용 등으로 지출한다. 이것은 교육투자의 금전적 비용이다. 열다섯이나 열여덟 살에도 돈을 벌러 나갈 수 있지만 스물이 훨씬 넘는 나이까지 노동시장에 나가지 않고 공부를 한다. 공부를 위해 포기한 소득 역시 금전적 비용이다. 공부는 학생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노력과 긴장을 요구한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방에 불이 꺼질 때까지 침실에 들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느라 정신적 육체적 긴장과 고통을 감수한다. 이런 것은 모두 교육투자의 비금전적 비용이다.

이런 비용을 들여 축적하는 지적자본은 나중에 큰 편익을 가져온다. 더 좋은 학교에서 더 많이 공부한 사람일수록, 나중에 노동시장에 진출해서 더 많은 소득과 권력과 명예를 차지할 가능성 높다. 이런 편익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자녀교육에 목숨을 걸다시피 투자를 하겠는가.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를 비난하는 이가 많지만, 이것은 불가피하고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경제학자들이 중시하는 생산요소는 원래 토지, 노동력, 자본이었다. 20세기 들어서는 토지를 자본의 한 가지로 여겨 노동력과 자본만 고려한다. 21세기에는 노동력, 자본과 더불어 지식 또는 기술이 등장했다. 자본의 국제이동이 자유로운 오늘날에는 국민경제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지식과 기술을 꼽는다. 많이 배운 사람이 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교육투자가 일어날 수 없고, 교육투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 국민경제에도 밝은 미래가 없다.

국가가 교육에 끼여드는 이유

교육투자의 비용이 현재적이고 확실한 것과 달리 그 편익은 잠재적이고 불확실하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많은 돈을 투자해서 획득한 지적자본이 노동시장에서 반드시 환영받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10년 후 어떤 산업이 뜨고 어떤 직종이 잘 나가게 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면, ‘고학력 백수’ 또는 ‘대졸 미취업자’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의 처지에서 보면 교육은 위험성이 크지만 성공할 경우 수익률이 높은 일종의 벤처투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위험과 불확실성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의대나 법대에 시험 잘 보는 학생들이 몰리는 것은 위험과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다. 국가가 시험을 통해 의료서비스와 법률서비스 공급자가 늘어나는 것을 통제하고 있어 비교적 안정된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분야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전형적인 경제적 현상인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교육은 시장에 내맡겨도 된다. 어떤 종류의 지적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얼마만한 돈과 시간을 투자하든, 그건 모두 개인의 선택에 맡겨도 괜찮다. 그리고 수요자가 있으면 공급자는 당연히 나타날 것이다. 사립학교다. 학교들이 좋은 학생들을 받아 좋은 대학으로 보내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는 내용, 원하는 수준의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학교를 선택하면 그만이다. 굳이 국가가 끼여들 필요는 없다.

그런데 도대체 왜 국가가 끼여들어 국공립학교를 만들고,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고, 교육과정과 내용을 통제하고, 장학금을 주고 학자금을 빌려주는 것일까? 여러 가지 경제적 비경제적 이유가 있다. 먼저 경제적인 이유부터 살펴보자.

첫째, 교육은 긍정적 외부효과(Positive External Effect)가 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은 누군가 연구해 놓은 기존 지식의 바탕 위에서 나타난다. 뛰어난 학자의 연구성과가 전문 학회지를 통해 공개되면 다른 연구자들이 그것을 활용해 자기의 연구를 진전시킨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응용기술을 개발하면 기업이 탄생하고 산업이 일어나며 많은 사람의 일자리와 소득이 생긴다. 교육은 국가가 볼 때도 일종의 벤처투자다. 국가가 길러낸 100명의 과학자, 기술자, 인문학자, 예술가 가운데 한 명이라도 대가(大家)가 나오면 그 투자는 성공적이다.

둘째, 교육서비스 시장은 ‘정보 비대칭성’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소비자가 상품의 품질이나 기능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육서비스의 경우 학생이나 학부모가 그 품질을 평가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버려두면 학교와 교사 등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시장이 되고 만다. 대학의 교직과정, 임용고사, 교육과정, 교과서 등 이런 가르치는 사람과 교육내용의 ‘품질’을 국가가 인증하고 관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선생님들의 주장’이라고 특별히 존중해야 할까?

국가가 교육에 개입하는 데는 경제외적 요인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헌법적 요구다. 19세기만 해도 노동자의 자녀가 교육을 받는 일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흔치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인류문명은 교육받을 권리를 시민적 기본권으로 인정하는 헌법을 출현시켰다. 국가는 최소한의 수준까지는 이 기본권을 실현시켜야 한다.

평등권과도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필연적으로 소득의 불평등을 낳는다. 결과를 평등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출발기회의 평등, 그 중에서도 교육기회에서 최소한의 평등을 보장하는 정도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의무교육제도와 장학제도다. 물론 여기에는 국민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하려는 국가권력의 의지가 한몫 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결론을 맺어야겠다. 교원단체는 교육서비스 분야 노동자들의 합법적 ‘카르텔’이다. 이 카르텔은 교육투자를 키우는 데 앞장선다. 그러나 조직원들 사이의 경쟁을 유발하는 모든 정책에 반대한다. 공적 영역임을 내세워 시장원리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주장’이라고 해서 다른 이익집단과 달리 특별히 존중하고 인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교육서비스 수요자로서의 주권행사를 원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상반되는 요구 역시 같은 무게로 존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유시민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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