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8월 2005-08-01   1099

혁명의 기록으로서의 영화

20세기의 역사는 영상을 통해 표현된 역사였다. 19세기 말 처음 선보인 이래로 영화는 20세기의 역사와 함께 하며 (무)의식적으로 20세기의 역사를 기록하고 투사해왔다. 영화는 그것이 투사(projection)되는 것이기에 거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다. 영상으로 표현된 역사, 혹은 영화가 표현한 20세기의 역사는 통상적인 역사의 시간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가령 역사의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의 선형적인 운동이라면, 영화는 상이한 역사의 순간들을 복수화하면서 이를 통해 역사의 숨겨진 결을 재고하게끔 한다.

7월 27일부터 8월 15일까지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영화와 혁명 특별전’은 이런 역사의 가능성을 추구해온 영화사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해방 60주년과 광주혁명 25주년을 기념해 준비된 이번 특별전은 영화가 어떻게 역사에 화답했는가를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와 혁명 특별전’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하나는 195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진행된 소위 ‘일본 언더그라운드 영화’들이다. 두 번째는 68년 5월 혁명을 거치면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일련의 정치영화들. 마지막은 80년 광주혁명 이후 광주를 다룬 영화들과 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자, 빈민 등이 벌인 투쟁의 기록들이다. 세 섹션에서 소개되는 영화들은 20세기 후반, 프랑스와 일본, 한국에서 벌어진 서로 다른 투쟁전선의 기록들이다. 이 영화들은 또한 정치와 예술, 내용과 형식의 전선에서 벌어진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서구가 68년을 기점으로 해서 급속하게 영화의 정치화 및 혁명화를 추구했다면, 일본은 그보다 10년 쯤 일찍 영화의 정치화에 몰두했다. 이는 놀라운 일로, 가령 1958년에 일본대학영화연구회에서 시작된 영화의 집단적·자주 제작의 기운은 이후 일본 언더그라운드 영화의 시발점을 이루는 사건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영화 제작의 새로운 흐름은 1960년대 미일안보조약 개정 저지를 둘러싼 학생운동과 만나면서 한층 더 정치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여기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인물이 바로 아다치 마사오다. 처음엔 저예산의 정치적인 포르노 영화를 만들면서 섹스와 정치의 문제를 연결해 다루었던 마사오는 이후 와카마츠 코지와 함께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의 투쟁을 기록한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71년)을 만들면서 정치영화의 새로운 혁신을 이뤄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일상을 기록한 이 영화는 “제국에 반대하는 동시에 서 너 개의 투쟁전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전설적 혁명가 체 게바라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전 세계적인 동시무장투쟁을 촉구하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이후 마사오는 감옥에 갇히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제국에의 투쟁’은 사토 미츠오와 야마오카 코이치의

<야마, 제국에의 공격>(85년)에서도 엿보인다. 이 영화는 일본 우익과 야쿠자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담고 있다.

60년대 이래로 상업영화 제작시스템의 바깥에서 집단적으로, 자주적으로 제작된 일본 언더그라운드 영화들은 혁명의 역사와 마주하면서 영화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치적 고민들의 표현이었다. 서구의 경우, 이는 베트남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텔레비전으로 처음 보도된 전쟁으로, 영상미디어가 처음으로 큰 힘을 발휘한 시기이기도 했다. 제도적인 영상미디어의 통제된 보도에 대항하는 동시에 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베트남 인민의 투쟁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면서 당시 유럽, 특히 프랑스의 영화감독들은 집단적인 영화제작을 시도했다.

1967년 크리스 마르케, 요리스 이벤스와 같은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클로드 를루슈, 장 뤽 고다르와 같은 감독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는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분명하게 표현한 영화다. 뉴욕의 반전평화 시위, 파리의 노동자 시위, 베트남 민중들의 반제투쟁을 기록한 이 영화는 제국에 반대하는 투쟁의 연대를 전세계에 호소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는 또한 ‘여기(프랑스)’와 ‘저기(베트남)’, 개인과 집단, 예술과 정치의 결합을 시도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영화감독들은 텔레비전이 결코 담아내지 않았던 현실을 영화 카메라에 담아내려 했고, 그러면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기 위해

<시네트랙트>와 같은 일종의 뉴스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학생투쟁에서 시작해, 노동자투쟁으로 이어진 68혁명의 기록은 장 피에르 토른의 <투쟁하고 승리하리라>(69년)에, 그리고 젊은 혁명의 기운은 기존의 상업영화 시스템의 바깥에서 만들어진 실험적인 영화들인 ‘잔지바르 영화’들에 담겨있다.

68혁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된 혁명이었다. 프랑스 68혁명이 남긴 유산은 60~70년대에 혁명을 꿈꿨던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로맹 구필의 <서른 살의 죽음>(82년)에, 그리고 이 좌절된 혁명이 전 세계적인 혁명의 역사와 맺고 있는 관계는 크리스 마르케의 <붉은 대기>(77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투쟁의 기록은 80년 광주혁명을 거치면서 본격화되었다. 좌절된 광주혁명의 기억은 광주혁명의 상처를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에서 다룬 김태영의 <칸트씨의 발표회>(87년)와 <황무지>(88년),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89년)와 이정국의 <부활의 노래>(90년), 장선우의 <꽃잎>(96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90년대를 거치면서 87년 6월항쟁, 노동자 대투쟁, 철거민 투쟁 등은 영화 카메라에 차곡차곡 담겨 관객들에게 보여질 수 있었다.

영화가 담아낸 혁명과 투쟁의 기록들은 역사에 대한 영화의 중요한 소임을 일깨운다. 영화는 아마도 ‘역사의 종말’이 선언된 이후에 역사의 진정한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일 것이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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