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11월 2008-11-11   1436

특집_우리교육의 미래구상: 한국사회의 대안적 교육


한국사회의 대안적 교육


이종태  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장 yjtkedi@hanmail.net


한국에서 교육은 입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쉬운 스트레스 해소감이다. 욕먹어야 할 대상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한껏 불만을 실어 분풀이를 하기 딱 좋은 주제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동상이몽일지라도 교육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처지라는 점에서는 누구나 매일반인 탓이다.

한국의 교육문제, 해법은 있는가?

교육문제에 관하여 나름대로 구체적인 고민과 실천을 모색해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갈수록 난감함을 느낀다. 어느 자리에서나 가볍게 시작한 교육 이야기는 채 5분을 넘기지 못하여 미궁으로 빠져들기 시작하고 10분을 넘기지 못하여 머리가 지끈거리기 일쑤이다. 분명 이론적으로는 해법이 있을 법한데, 현실의 구석구석에서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는 미시 거시적 기득권들이 모든 길을 봉쇄한다. 그러다보니 어느 것이 이론이고 어느 것이 현실적 요인인지 헷갈리고 정론을 말해야 할 학자집단까지도 서슴없이 편갈이 말싸움에 한 몫 낀다.

두어 해 전부터 나는 예언가연하고 있다. 우리 교육이 이대로 가면 2030년 이전에 후진국 대열로 추락할 것이라는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예언을 하고 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 교육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입시위주 교육과 천정부지의 사교육을 꼽는다. 특히 사교육은 교육의 양극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며 이것이 부동산 가격을 매개로 한 지역분열로 이어짐으로써 한국사회의 해체를 가속화하는 주범으로 인식된다. 최근 수년간 급증하고 있는 조기유학은 한국교육의 심각한 병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들은 전체적으로 공교육 또는 학교교육 체제의 심각한 무기력증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 대체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나는 좀 다른 각도에서 우리 교육의 문제를 본다. 그 핵심은 현재의 교육이 미래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의 역량을 길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타고난 잠재력조차 체계적으로 거세시켜 회복불능의 불구자로 만들고 있다. 그 주범은 교육현장은 물론 우리 사회에 만연된 객관화된 점수에 대한 맹신이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학생들은 무언가를 알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점수를 따려고 공부한다. 어떤 지식이 중요한지 아닌지는 그것이 시험에 나오는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결정적으로, 한 사람의 능력은 그의 전체적인 됨됨이보다는 그가 받은 점수의 높낮이로 판단된다. 그 점수가 무엇을 의미하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산출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검토 없이…….

이처럼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넌센스에 불과한 일들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으며 우리 교육과 사회 전체의 작동원리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는 미국의 대안교육자 존 테일러 개토가 말한 바와 같이 한마디로 바보들의 행진이다. 시험은 잘 보나 아는 것은 없고 학벌은 화려하나 문제 해결력은 형편없다. 더구나 이런 ‘똑똑바보’들이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좋은 자리를 독식한다. 창의적인 지식이 생존력의 기반이 되는 시대에 이런 사회가 다다를 종착역은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아니 최소한 해결의 실마리라도 될 돌파구는 없는가? 솔직히 이 물음에 대하여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지난 10여 년간 정부가 추진한 교육개혁이나 교육혁신이 남겨놓은 열매는 너무도 빈약하다. 그것이 해결한 문제보다는 그로 인하여 생긴 문제나 사회변화에 따라 새롭게 대두된 문제들이 더 많다. 그동안의 개혁 정책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 교육의 기초 체력을 기르기보다는 단기적이고 대증요법식의 처방에만 몰두해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교육(어쩌면 사회 전체)이 가지고 있는 변화의 리더십이나 모멘텀은 뿌리째 고갈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척박한 땅에 여린 싹이 새로 돋고 있다. 이른바 대안교육이다. 이들은 아직 널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우리 교육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있으며 최소한 거기에 관여하는 대부분의 학생이나 학부모, 교사들에게 높은 만족과 신뢰를 주고 있다. 이들이 빈사지경에 있는 우리 교육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대안교육, 그 꿈과 현실

사전적 의미로 대안교육이란 목표나 내용, 방식에서 기존 교육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는 교육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존 교육이라 하더라도 목표나 내용, 방식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데 도대체 얼마나 또는 어떻게 달라야 그것이 대안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만이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대안교육은 처음에 기존 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시작되었다. 부적응의 원인이 아이들이 가진 고유 특성이나 환경을 배려하지 못한 데 있다고 본 교육학자들이 있었다. 이들 새로운 교육자들은 어른들의 시각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과제를 아이들에게 부과하기보다는 아이들의 눈으로 어떤 것이 필요한지,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지를 먼저 찾아내고 아이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러한 것들을 채워나가도록 하였다. 루소가 말한 아동중심교육 사상을 실제의 교육 활동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안교육은 단지 교육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적응의 해소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들의 삶 전체를 행복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움의 과정만이 아니라 평생의 삶에서 남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 하며 또 사회 자체가 평화로워야 한다. 이를 위해 대안교육은 아이들에게 혼자만 잘 사는 법 대신 더불어 잘 살기를 가르친다. 따라서 대안교육에서는 경쟁과 서열화를 배격하고 상생의 삶을 중시한다.

1980년대 이후 지구 환경과 생태 문제가 지구상의 생명 전체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대안교육이 추구하는 목적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그것은 생태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지구적 차원의 생태 위기는 바로 물질적 풍요와 편의지향의 인간중심적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대안교육에서는 아이들에게 욕심의 크기를 줄임으로써 이웃과의 더불어 삶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을 넘어 자연, 그리고 초자연세계와 공생하고 교감하며 살기를 가르친다.

이처럼 대안교육은 기존의 교육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질적으로 다른 지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교육만이 아니라 교육이 놓여 있는 사회 자체를 대안적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육과 사회를 꿈꾼다. 그것은 근대적 양식을 탈피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물질적 욕망에 기초한 서구적 발전 모델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전자는 일반적인 탈근대 경향과 일치하지만 후자는 오히려 대립적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대안교육 현장들이 이러한 생각을 똑같이 공유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조점의 차이도 있고 때로는 별다른 철학적 기반을 정립하지 못한 곳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사회적인 지원체제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왜 굳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대안교육을 하려고 하는가 묻는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행복한 교육의 가능성 보여준 대안학교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대안교육이 모색되기 시작한 것은 학생들의 성적 비관 자살이 급증하던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이다. 90년대 중반부터는 대안교육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0여 년 동안 대안교육 현장들은 다양한 형태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이들을 단순화를 무릅쓰고 몇 가지로 유형화해본다면 제도권 안의 대안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특성화중고등학교(현재 중학교 8, 고등학교 21)와 비제도권 미인가 대안학교(초중고 과정으로 대략 100여 곳으로 추산)가 양대 축을 이루는 가운데 몇몇 교육청에서 청소년 관련 교육기관을 지정하여 운영하는 위탁형 대안교육기관(현재 29개)과 집에서 부모와 함께 학습하는 홈스쿨링이 양편의 느슨한 형태로 존재한다. 홈스쿨링과 미인가 대안학교의 중간형이라 할 수 있는 ‘탈학교 공간’도 최근 선을 보이고 있다. 2008년 현재 이들 전체 대안교육기관에서 배우고 있는 학생들의 수는 대략 7~8,000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는 우리나라 전체 초중고 학생의 0.01% 남짓 수준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대안교육은 그 역사적 깊이나 전체 교육에서 차지하는 양적 비중으로 보면 매우 일천하고 미미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는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학교’와 ‘교육’에 관한 우리 사회의 획일적인 고정관념을 흔들어놓았다. 학교의 형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교육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대다수 일반 학교 재학생들이 학교나 교사에 대하여 부정적인 관념을 갖고 있음에 반하여 대안학교 학생들은 스스로 매우 만족하는 편이다. 특히 그것은 기존 교육체제에서 뛰쳐나갈 곳이 없어 자학과 가학을 반복할 수밖에 없던 많은 학생들에게 진정한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공부라고 하면 국영수 위주의 주지과목밖에 몰랐지만 대안학교들은 배워야 할 훨씬 다양하고 중요한 것이 있음을 보여주었고, 또 그랬어도 대학 진학 경쟁에서 크게 불리하지 않을 수 있음을 입증하기도 하였다. 또 일반학교에서는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가 소원하고 상당한 불신을 안고 있지만 대안학교에서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긴밀하게 협력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제도권 내 대안학교들은 치열한 입학경쟁이라는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이처럼 상당수의 대안학교들은 현재 수준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학교들이 저 정도만 되어도 얼마나 좋을까 싶은 부러움을 받고 있다.

제도권의 낡은 틀에 갇히기 시작한 대안학교

그렇다고 한국의 대안교육이 상당히 만족스러운 상태라든가 아니면 장차 장밋빛 전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기에 따라 일종의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대안학교 설립을 위한 본격적인 노력이 시작된 지 10년이 지나면서 적지 않은 현장들은 나름의 안정 궤도에 접어들었지만 지척간에 매너리즘이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일부 현장에서 넘쳐나는 지원자들을 가리는 기준으로 성적을 택하고 있음은 그 단적인 예이다. 거기에는 ‘학교’만 있을 뿐이지 더 이상 대안을 기대할 수는 없다. 평범한 학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대안교육 정체성의 위기라고 할 만하다. 그 증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초기에는 일반 학교와 같은 강압과 획일적 규제만 없어도 너무나 좋은 대안교육 현장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 교육 환경이 달라졌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안교육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마땅치 않다. 적지 않은 대안교육 주체들이 철학적 빈곤으로 인한 상상력의 부족을 절감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고등학교 과정의 대안학교들은 대학입시의 압력으로 대안교육 정신이 더 혼미해지고 있다.

밖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도 너무 크다. 비제도권 대안학교들의 경우 당장 학교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적 지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학부모들의 짐은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지만 교육활동을 위한 지출은 늘 허기가 져 있다. 이런 조건에서 자신 있게 내놓을 만한 질 좋은 교육을 기대할 수 있을까. 또 기아 임금 이하에서 두세 사람의 몫을 담당해야 하는 교사들의 희생도 언제까지 요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반면 제도권 내 대안학교들의 경우 대안교육에 관하여 무지한 관료들의 간섭과 규제가 대안교육의 정체성을 항시 위협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대안’과 ‘평범한 학교’ 중 택일을 강요하는 비수가 되고 있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교육적 대안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 대안교육이 기존의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대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의 양적 확산은 이미 벽에 부딪치고 있으며 안팎으로부터 스스로의 존립을 위협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교육은 비정상적인 한국교육 현실이 만들어낸 일시적 유행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많은 나라들의 교육적 사정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교육에 관한 관료적 통제나 입시경쟁이 우리보다 훨씬 느슨한 나라들에도 7, 80년대부터 우리와 비슷한 대안교육 현장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2000년도에 들어서도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 학교가 아무리 우리보다 자유롭고 입시부담이 작다고 해도 적지 않은 아이들이 거기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며 좀 더 자유로운 놀이와 학습공간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 현장들의 형태나 운영방식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도 기발하다. 아예 학교건물이 없이 버스로만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다양한 체험학습을 하는 곳도 있는가 하면 학교는 있어도 수업이 없이 각자의 프로젝트나 인턴십만으로 학습을 하게 하는 곳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다니는 아이들은 일반 학교에 다닐 때 맛볼 수 없었던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되며 또 학력이나 자격증을 얻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단적으로 기존의 학교체제가 역사적으로 그 수명을 다하고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 교육이 보여주고 있는 위기적 증상들 역시 비록 사회문화적 특수성에 의해 증폭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세계사의 흐름을 따르는 보편적 현상이며 대안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한국교육의 대안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이라는 직접 요법보다는 교육과 사회의 변화라는 거시적 흐름 속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육을 준비하는 숨 긴 간접요법 방식으로 모색될 필요가 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고나 할까, 해법이 없어 보이는 우리 교육의 고질적 문제들은 짐짓 내버려 두자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에서 대안교육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갖는다. 그것은 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척후병이라 할 만하다. 아직은 그 확산 범위가 제한되어 있지만 대안교육 현장들은 근대학교의 양식을 뛰어넘는 다양한 실험들을 해왔고 나름의 성공적인 사례들을 만들고 있다. 그것들은 최소한 미래의 교육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감지하게 해준다. 바꾸어 말하자면, 근대교육 패러다임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고 그 시대적 결함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그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장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욱 확대되도록 돕는 것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정책 당국이나 시민사회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학교’를 넘어 다양한 삶의 현장으로

여기에 더하여 할 수만 있다면 기존의 학교들 하나하나를 여기에 가깝도록 변화시키려는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미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 등 제도권 안에서의 노력도 가시적인 성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가속화시키기 위해서는 개별 학교들을 학교체제의 거대한 사슬 구조에서 떼어내야 한다. 이 점에서 학교 자율화 또는 학교자치 운동은 우리 교육의 미래를 향한 징검다리의 의미를 지닌다. 물론 그것을 건너는 동안 신자유주의니 계층 간 지역간 교육격차니 하는 악성 여울들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넘어야 할 장애물이지 피해야 할 것은 아니다. 무섭다고 피한다면 과거와 함께 침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미흡하다. 어쩌면 속도가 너무 느려 교육 전체를 변화시키기 전에 우리 사회가 회복불능의 교육적 모라토리움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또 다른 접근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곧 국가 차원에서 기존의 교육체제를 탈근대적으로 해체시키고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것은 외형적으로 90년대 이후 역대 정부들이 추진해왔던 교육개혁 또는 교육혁신과 유사한 방식일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90년대 이후의 교육개혁이 근대 학교체제의 비능률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새로운 개혁은 학교체제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선결되어야 할 것은 교육에 관한 구태의연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는 일이다. 그 관념의 핵심은 ‘교육이란 학교에서 일정 기간 동안 교사가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실상 이 생각은 부정된 지 오래이다. 이미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평생학습사회나 지식기반사회의 도래는 이런 생각과 양립할 수 없다. 여기서 ‘교육’은 ‘평생학습’으로 대체되며 배움의 장 역시 ‘학교’를 넘어 다양한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안교육의 사례들은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배움의 내용들이 있으며 또 교사의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고정관념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서두에서 말한 기득권 구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정관념의 탈피는 곧 기득권 구조의 해체를 의미한다.

문제는 기득권 구조와의 정면 대결이 너무나 소모적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우회 전술이 필요하다. 앞으로 정부(언제 어떤 정부일지는 모르지만)가 해야 할 교육혁신의 주된 내용은 학교 밖에 다양한 배움터들을 새로 만들고 거기서 배운 결과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 물론 거기에는 성인만이 아니라 학령기 청소년도 올 수 있어야 한다. 낡은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 집을 짓기보다는 새 장소에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이다. 아마도 그 사이에 낡은 집도 근사하게 리모델링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 집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앞서 말한 대안교육의 경험과 함께 OECD가 선도하는 교육개혁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미래를 살아갈 새로운 세대에게는 전통적인 교과지식보다 ‘핵심 역량쪰’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그들의 제안은 깊이 음미할 만하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영어단어 수학공식 하나 더 외우는 것보다 먼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우리 사회의 오랜 교육적 격언에서 멀지 않다. ‘핵심 역량’은 근대교육에서 강조되어온 지식과 정보의 습득 자체보다는 그것을 다른 사람과 잘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시한다(범주 1). 그러면서 그것은 ‘이질적인 집단 내에서의 상호작용’(범주 2)과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범주 3)라는, 근대교육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을 부각시킨다.

현재로서 이러한 제안들이 기존의 교육체제에서 어떻게 수용될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미 호주나 뉴질랜드는 이 개념을 국가교육과정에 반영하기 시작했지만 그것과 종래 학교체제는 양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핵심 역량’의 적극 수용은 학교체제의 전면적인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핵심 역량’이 막연한 교육 덕목이 아니라 미래사회를 살아갈 사람들이 구비해야 할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그것의 수용은 피할 수 없어 보이며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학교 밖에 만드는 다양한 배움터들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OECD 개혁안은 분명 독소를 담고 있다. 과거 교과지식이 그러했듯이 ‘핵심 역량’ 또한 경제적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의 독점물일 수 있다. 또 그것은 오로지 경제적 번영이라는 근대적 가치와 철학을 바탕으로 함으로써 근대문명이 안고 있는 한계를 답습할 가능성도 있다. 이들 독소의 영향을 얼마나 최소화할 수 있는가는 바로 지속가능한 미래의 구현 여부로 직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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