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1월 2000-11-01   932

길동무가 좋으면 먼길도 가깝다

‘21세기에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라.’ 어느 재벌 기업 총수의 말이 아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측의 대남일꾼들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10월 9일부터 14일까지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행사에 참관하기 위해서 평양을 방문한 남측의 정당, 사회단체 관계자들은 북의 변화를 실감하였다. 북의 변화가 추구하는 목적은 6ㆍ15 남북공동선언 이행이다.

남쪽에서는 6ㆍ15 공동선언과 관련해서 북측의 이행의지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다. 심지어 6ㆍ15 공동선언 1항인 자주의 원칙과 2항의 통일방안에 대해서 ‘북에 당했다’는 식의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남측 사회 일각의 이같은 분위기와는 달리 평양에서는 남한에 대한 적대감이나 불신을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고려호텔 2층에 놓여 있는 아태평화위와 삼성의 이름이 붙어 있는 텔레비전에 대한 북측 관계자의 설명에서도 남한에 대해 변화한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남쪽사람 맞는 따스한 동포애

“과거에는 남조선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항상 미국을 앞장세웠기 때문이죠. 그러나 6ㆍ15 선언 이후에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같은 감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의 상표를 단 텔레비전이 북에 진열되어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양시내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일행을 따뜻이 맞아주었다. 주체탑을 방문했을 때 소풍나온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서울에서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아이들이랑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하고 말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벌써 저만치 갔다. 부모들은 내 말을 듣고 환히 웃더니 애들을 부른다. 난 어려움 없이 아이들이랑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평양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따스한 동포애였다. 서울에서 온 사람을 반가이 맞아주는 모습에서 남북의 거리가 휠씬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북측의 변화는 남한 참관단에 대한 태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북측 안내원들은 남측 손님들의 평양 방문이 혹시나 남북관계에 부담이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북의 신문이나 방송은 우리 일행의 방북에 대해서 도착사실과 출발 사실만 보도했다. 김포공항을 떠나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하는 고려항공 비행기 속에서 북측 안내원은 이런 보도방침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들은 이 약속을 지킨 것이다.

노동당 행사 참관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사람들은 북이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남측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를 축하하러 왔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할까봐 염려한 것이다. 그렇지만 북측 안내원들은 “여러분들이 방문은 여야가 팽팽히 대치하는 남측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오히려 우리 일행에게 신중하게 행동해줄 것을 요구했다. 우리 참관단이 북한의 ‘매스컴을 타는 것’은 처음부터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우리는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55돌 경축연회에 초청받았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김영남 위원장은 만찬사를 하면서도 우리 일행의 방북을 언급하지 않았다. 주체사상탑을 방문할 때도 “주체사상탑에서 평양시내를 잘 보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주체사상탑 방문이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로 주체사상탑에서는 남산타워에서 서울시내를 보는 것처럼 평양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북측의 변화 피부로 느껴져

북측에서는 우리들이 탈 차량의 색깔까지 세심히 고려하였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 때 북측에서 빨간색 벤츠에 장기수들을 태웠다. 그후 남쪽에서 ‘왜 하필 빨간색이냐’는 가벼운 시비가 일었다. “이런 시비가 다시 생기지 않도록 신경 쓴 탓에 남측 손님들이 탈 차량은 가장 회색에 가까운 것을 골랐다”고 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북한의 이와같은 변화는 6ㆍ15 남북공동선언 때문에 가능하다. 6ㆍ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북한의 노력은 그만큼 진지했다.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 나선 것 자체가 북한에서 변화가 일고 있다는 징조이다.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데 관여했던 북한의 한 관계자는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는 마음으로 정상회담을 준비했다고 한다. 북은 이미 정상회담에 나설 때부터 남한을 먼 길을 함께 갈 벗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평양방문 기간 동안 우리 일행이 가장 놀랐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북한의 대규모 군중시위와 집체예술이었다. 이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사회주의이니까 가능하다.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돈주고도 못한다”는 말은 그들의 자부심의 표현이다. 입을 딱 벌이고 있는 남쪽 방문단에게 “강철같은 규율, 도덕적 자각, 양심과 의리가 일시단결을 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 일행은 “하여튼 강제로 시켜서 될 일도 아니고, 돈 주고 될 일도 아니다”는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북한 안내원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대규모 열병과 군중시위를 설명하는 중에도, 군인들의 열병에 대해서는 ‘무력시위가 아니다’ 라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 일행에게 사소한 오해를 사는 일조차 피하고 싶은 데서 나오는 친절이다. 실제로 열병에 참여한 대부분의 군인들은 무장을 하지 않았고, 무장한 경우라도 자동소총과 폭탄투척기 등 경무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노동당 창건 기념식에서 군인들이 열병을 하는 것은 노동당 시대의 독특한 정치가 선군정치이기 때문이라고 친절히 덧붙였다.

북한의 변화는 자신들의 상태를 솔직하게 말하려는 태도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동안 북한 주민들을 접촉한 사람들에 의해서 북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지적당하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고 알려졌다. 지금 북한 사람들이 가장 큰 약점으로 여길만 한 것은 아무래도 먹고사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자연재해, 사회주의의 붕괴, 제국주의의 압박 때문에 그동안 고난의 행군을 겪었는데 특출한 지도자와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 때문에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낙원의 행군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공식적으로 하는 말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안내원은 자본주의와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적응해야 하고, 또 달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북한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겪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와 교역을 추진하고 있고, 그동안 자본주의와 교역이 더딘 것은 북이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에서 앞으로 북한이 더 많이 변화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공사가 중단된 유경호텔. 한 때 남쪽에서는 실패한 북한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 세계 최대의 호텔, 하지만 공사가 중단되어 몇 년째 방치되고 있는 것에 대해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루에도 몇번씩 짓다 만 유경호텔을 보면서도 아무런 질문을 안 한다는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나는 조심스레 “유경호텔을 짓다 만 것이 놀림거리가 되면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북측 안내원의 답변은 너무나 명쾌했다. “그동안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호텔 지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평양 시가지의 모습도 좀 색달랐다. 사람들이 거리매점 앞에서 줄지어 서 있었다. 거리매점에서는 얼음과자, 솜사탕, 강냉이 튀김, 산적, 술 등을 팔았다. 솜사탕이 가장 인기가 있는 듯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을 끝낸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많이 공급하라고 해서 국가경제위원회에서 ‘간이대’를 설치해서 음식을 판매한다고 한다. 밤에도 음식을 파는데, 밤에는 ‘야시장’이라고 부른다.

평양의 번화한 거리인 창광거리에서 간이대를 볼 기회가 있었다. 아쉽게도 북한 돈이 없어서 사먹을 수는 없었지만 평양시민들의 모습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나 명절에 소주 한 잔에 안주까지 1원60전어치 먹고 간다” 하고 그냥 가버린다. 그걸 본 간이대 담당 여성은 가볍게 웃고 넘어간다. 음식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서 있는 평양의 모습, 이 또한 평양의 변화가 아닐까?

지금 평양은 새로운 것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자신들의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21세기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평양은 크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남쪽이 이러한 변화에 호응하여 남북이 상생하는 통일로 한걸음 다가가기를 기대한다.

김창수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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