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1월 2000-11-01   1782

인터뷰 ㅣ 그냥 연기자 홍석천으로 봐주세요

“동성연애자 아니고, 동성애자예요. 가감 없이 써주시고, 제목 뽑는 것 신경 좀 써주세요.”

입이 바싹바싹 탄다는 홍석천 씨(30세·탤런트)는 지난 10월 14일 오후 그의 사무실 스타지아에 모인 잡지사 기자들에게 거듭 당부했다. ‘호모 발언파문’ ‘20대 사업가와 열애설’ ‘동성연애 경험’ 등 커밍 아웃 이후 지난 한 달간 신문, 잡지들로부터 때로는 황당무계한 왜곡의 융단폭격을 맞아야 했던 홍석천 씨는 마음이 안 놓이는 모양이다. 회견을 마치고 나가는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제발 ‘자신이 말한 대로만 써달라’고 부탁한다.

2시간 남짓 커밍 아웃 이후 최근 한 달간 어떻게 지냈는지, 그 동안 당한 사회적 차별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놨다. 모 여성지 기자가 ‘모든 방송에서 잘렸는데 최근 돈 버는 일은 뭘 하냐’는 질문을 하자 그는 “이제 몸이라도 팔까요?” 하며 힘없이 웃기도 했다. 최근 홍석천 씨는 경인방송 <연예세상>, 인터넷 시트콤 <파라다이스> 두 편에 출연중일 뿐, 그 동안 고정 출연해오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해고당했다.

“<뽀뽀뽀> 개편 때마다 살아남은 사람은 뽀미 언니와 저, 딱 둘이에요. 어린이 프로를 위해 태어난 연기자 같다는 칭찬도 받았어요. 제가 너무 바빠서, <뽀뽀뽀> 세 코너 중 한 코너만 빼달라고 요청해도 홍석천 씨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다고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런데, 방송국 ‘윗분’들은 당사자 확인조차 안 된 스포츠신문 기사를 믿고, 저랑 전화 통화 한번 하지 않고 여지없이 자르더군요.”

“아저씨가 동성애자라서 잘렸어!”

그가 시드니에 가 있는 동안 한 스포츠신문엔 “홍석천 동성애자…”라는 머릿기사가 실렸다. <뽀뽀뽀>에서 함께 일하던 담당PD가 전화로 자초지종을 물었고, ‘윗분’들이 반대해서 당분간 같이 일하기 어렵겠다고 말한 뒤, 나중에 기회 되면 같이 일하자고 위로한 게 전부였다. 그가 없으면 큰일 날 것처럼 말하던 방송은 그렇게 해고통지서를 날렸다.

“제가 커밍 아웃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남자친구와 1년 전 사귀다 헤어지게 되면서였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려면 내 모습 인정하고, 커밍 아웃 해야지…. 그러던 차에 SBS <夜 한 밤에> 녹화중 김한석 씨가 묻더군요. 소문에 따르면 홍석천 씨는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한다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그래서 솔직히 사실이라고 말했는데, 방송에선 편집됐어요. 그리고 나서 『여성중앙21』 기자가 전화했더군요. 계속 묻길래 솔직히 말했고, 제가 부탁했죠. 내가 아직 부모님께 커밍 아웃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부모님께 커밍 아웃할 시간을 좀 달라, 그랬는데 그게 안 된 거죠.”

씁쓸하게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내내 장난기 어린 말투로 농담도 잘하더니 부모님 얘기가 나오자 그는 숙연해졌다. 아무리 설득시키려 노력해봤자 가족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홍석천 씨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뭔지 납득조차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시절까지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지만, 누구 하나 툭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고, 사회적으로 동성애자가 용인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오로지 이단아 취급을 받으며 사회적 이지메를 당할 뿐이었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처럼….

“황당한 언론보도를 접하면 맘 속으로 화나요. 때로는 내가 마녀사냥의 제물이 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도 들지요. 단순히 개인의 성적 지향을 얘기했을 뿐인데, 마치 파렴치범 취급하는 것도 사실은 속상하죠. 제가 누굴 죽였습니까? 누굴 때렸습니까? 다른 이성애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동성임을 말했을 뿐인데, 받아야 하는 사회적 냉대는 너무 가혹하더라고요. 또, 솔직히 말해서, 제 능력이 모자라 방송에서 잘렸다면 할 말 없어요. 만일, 이제 홍석천 TV에 나와도 재미없어, 다른 채널로 돌려버릴 거야, 이런 거면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가끔 길거리를 지나다 꼬마아이들을 만나면 애들이 묻는단다. “아저씨, 왜 요즘 안 나와요?” 그때마다 그는 “응, 아저씨가 동성애자라서 잘렸어!” 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아저씨가 요즘 많이 바빠서”라고 얼버무리지만, 속으론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한다.

가발이라도 쓰고 방송하고 싶다

하지만, 홍석천 씨의 커밍 아웃은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우선 그의 커밍 아웃을 지지하고 나선 인권단체들의 활동이 주목할 만하다. 지난 10월 4일 느티나무 카페에서는 ‘홍석천의 커밍 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의 발족과 함께 지지선언이 이뤄지기도 했다. 웹사이트 상에 마련된 이 모임에서는 지속적으로 네티즌들의 의견을 접수하고 있으며, 방문 횟수가 2만여 건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 홍석천 씨는 지금까지 아무런 연관없이 살아온 사회운동가들이 그에게 보이는 관심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까.

“고맙죠. 저를 위해 나서주는 동성애 인권단체 등 많은 시민단체 분들께 정말 감사드려요. 한번도 저랑 만나지 못했던 분들인데, 도와주고 계세요. 정말 고마운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때론 어떤 사회운동가가 그에게 이참에 아예 동성애 인권운동가로 나서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런 분이 있었어요. 이제 홍석천 씨는 연예인으로선 끝난 거다, 그러니까 이참에 우리랑 같이 운동이나 하자…. 물론 취중에 말씀하신 거지만, 전 가슴이 아팠어요. 의식이 깨어 있다는 운동가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그러나 전 제가 연예인으로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더 열심히 활동하고, 살아서 꿈틀대는 모습을 보여야죠. 제가 만일 풀죽어 있고, 활동 못하게 되면 아, 동성애자는 성 정체성이 밝혀지는 순간, 우리 사회에서 바로 매장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주게 되거든요. 그런 잘못된 본보기로 남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연예인으로서 열심히 활동하고, 또 동성애자로서 동성애 인권운동에 참여하는 편이 오히려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의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 아니냐고 그는 역설했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오는 10월 27일 인권영화제 오프닝을 맡았다. 한 여성지 기자의 말처럼 돈 되는 행사는 아니지만, 그는 ‘커밍 아웃 파문’ 이후 인권관련 행사에 더욱 열심히 쫓아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지금 그는 아직까지도 혼란의 아노미를 빠져 나오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다만 조용히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고 말한다. 가능하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 부족한 연기공부를 하고 싶다고 한다.

“뮤지컬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파고들 거예요. 사실 연기하면서 답답한 게 많았어요. 그걸 메우고 싶어요. 뭐든지 자신감을 갖는 것까지가 힘들 뿐, 자신감을 얻으면 뭐든 할 수 있게 되잖아요. 저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을 회복하는 일인 것 같아요.”

긴 인터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는 지쳐 보였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서운함이 목젖을 흔들어 때로는 서글픈 음성을 만들기도 했다. 가끔 긴 한숨과 침묵으로 천장을 응시하기도 하지만, 그는 또렷하게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계획이 서 있었다.

“방송복귀가 희망사항이에요. 재미있는 시트콤 있으면, 가발이라도 쓰고 나가고 싶어요.”

쁘아종 특유의 목소리로 유머러스하게 말했지만, 그는 절규하고 있었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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