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2월 2002-02-01   356

우리들의 일그러진 지식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지식인


작년 12월 27일 수원 지방법원은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전자의 전·현직 이사 10명에게 총 977억 원을 회사에 배상하라는 주주대표소송 1심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역사적인 판결에 대한 기쁨도 잠시, 곧 참담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이번 판결의 의미를 왜곡하고 매도하는 재계측 논객들의 억지와 독설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의식구조를 이처럼 일그러지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예를 들어보자. 지난 1월 3일자 『중앙일보』에는 ‘은밀한 반(反)시장 혁명’이라는 제목의 시평이 실렸다. 『중앙일보』의 자매지인 월간 『에머지새천년』 강위석 편집인의 글이다.

강 편집인은 이번 판결과 9?1 뉴욕 테러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의 우등생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침공·파괴’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논리다. 더 나아가 ‘삼성전자 이사들에게 경영책임을 묻는 것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요즘 네티즌들이 흔히 사용하는 ‘허걱!’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 논리비약의 자유로움(?)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편, 민경국 강원대 교수는 『한국경제신문』 1월 4일자와 11일자에 실린 두 차례의 시론에서 ‘일개 법관과 일개 시민단체가 주관적으로 해석한 정황을 가지고 재판을 하는 것은 소도 웃을 일’이라거나 ‘3년이 걸렸든 수십 년이 걸렸든, 법관이 경영판단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것은 어쨌든 졸속’이라고 했다.

여기에 이르면 솔직히 말해 소름이 돋는다. 민 교수가 기업의 절대자유를 부르짖는 자유기업원의 주요 논객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법부의 권위를 이처럼 한마디로 매도하는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필자를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강 편집인이나 민 교수는 스스로를 우리 사회에서 박해받는 순교자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게 될 법이나 한 이야기인가. 한국 사회에서 개혁과 진보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던, 아니 의미 있는 소수로나마 취급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군사정권에서도 문민정권에서도, 영남 정권에서도 호남 정권에서도, 한평생을 양지에서만 살았을 법한 사람들이 거꾸로 핍박받는 소수로 자처하는, 이 기막힌 의식구조의 전도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이른바 자유주의자들이 사법부의 권위마저 깔아뭉개 가면서 절대선으로 내세우고 있는 그 ‘자유’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들이 내세우는 자유가 ‘만인의 자유’인가, 아니면 ‘소수 특권층만의 자유’인가.

이번 판결은 1심에 불과하다. 원고와 피고 모두 항소 의사를 밝힌 이상,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르는 2심과 3심 판결이 남아 있다. 재계의 주장대로 경영판단의 자율성이 침해된 것인지, 아니면 참여연대의 주장대로 보호받을 만한 경영판단이 아예 있지도 않았는지를 놓고 방대한 사실심리와 치열한 법리공방이 이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희망만은 부정하지 말기를 재계의 지식인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그러면, 지식인들의 일그러진 의식구조를 바로잡는 힘은? 그 왜곡된 자유를 위해 내 이름을 팔지 말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다수 시민의 목소리가 아닐까.

김상조 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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