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2월 2002-02-01   1116

13년 전 의문사한 선배를 가슴에 묻은 한 후배의 공개서한

‘국정원은 이내창 죽음의 진상을 밝혀라’


지난 1월 1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양승규)는 89년 거문도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이내창 중앙대 총학생회장이 수사기관에 의해 타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한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이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13년 간 죽음의 진실을 알려온 한 후배로부터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듣는다.

편집자주

형, 또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며칠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형 사건에 대한 중간발표를 했습니다. 그 날 흐린 하늘에 간간이 눈발이 흩날렸지요. 형의 기일인 8월 15일, 망월동 참배 때 뵈었던 큰형님과 둘째형님도 나오셨더군요. 큰형님은 이제 머리도 많이 세고 주름살도 깊어졌습디다. 어머니의 안부를 여쭈었더니 여전히 병상에서 거동을 못하고 계신다고 해서 우리는 또 착잡해지고 말았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한두 해 뒤엔가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지요. 저만 해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오는데 하물며 어머니에게는 지난 세월이 얼마나 참혹한 시련이었을까요. 이제 병상의 어머니에게 작은 위로라도 드릴 수 있게 된 것일까요.

다행히 진상규명위원회는 중간발표를 통해 당시 경찰과 검찰에서 발표한, ‘혼자서 거문도 여행을 갔다가 단순 실족 익사했다’는 수사결론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사건 다음날인 8월 16일 여수를 거쳐 거문도에 가서 마을사람들, 식당과 다방 종업원 등을 면담하면서 수집한 증언들에서 크게 진전된 것이 없었습니다. 형은 죽기 직전까지 안기부 요원과 함께 있었고 무엇인가에 의해 심하게 얻어맞은 뒤 바다에 버려진 채 숨져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어떤 집단이 형을 왜 죽였는지는 명백했습니다. 그러나 중간발표의 그 조심스러운 내용은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확인해준 정도였어요. 이것을 위해 13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단 말인가, 고작 이것을 위해 유가협 부모님들이 가슴 저미는 고통 속에서 400일 넘게 아스팔트 위에 부는 칼바람을 맞아야 했나, 생각하니 허탈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형이 살해당한 그 날 일을 혼자 머리속에 자주 그려봅니다. 그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다음날 후배들과 여수항 일대와 거문도를 샅샅이 뒤지며 수집했던 증거와 증언을 바탕으로 얼굴 없는 살인자들에게 이끌려 섬으로 유인돼 쫓기며 위협당했을 그 상황들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생생한 분노로 피가 뜨거워지곤 합니다.

안기부 여직원과 함께 간 거문도

89년 8월 14일. 오전 10시 30분쯤 젊은 남녀 두 사람이 학교로 형을 찾아왔습니다. 이때부터 형은 허둥대기 시작했지요. 불과 세 시간 동안 학교와 안성 시내를 세 차례나 오가면서 뭔가를 준비했고, 오후 다섯 시쯤 학교를 떠납니다. 여수행 밤기차를 평택이나 천안에서 탔겠지요. 그리고 새벽녘에 여수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도시의 스산한 새벽 역 광장에서 형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나는 후배들과 8월 17일, 온종일 여수항 주변의 여관을 돌아다니며 혹시라도 형이 동행자들과 투숙한 흔적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 누군가가 여수 여객터미널에서 똑같은 필체로 쓰인 형과 동행자 두 사람의 승선 신고표를 발견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안기부 인천분실의 여직원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13년 전에 우리가 밝혀낸 사실입니다. 그 이후에 제 상상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번 발표는 공백으로 남아 있던 몇 가지 조각그림들을 맞춰주었습니다. 배 안에서 형을 둘러싸고 감시하고 있던 세 사람의 사내. 거문도 선착장에 배가 도착하자마자 형은 도주를 했다지요.

골목 안 민박집으로 뛰어들어가 다급하게 ‘빈방 있습니까’ 묻고는 ‘뒷문이 어디지요’ 하면서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마루로 뛰어올라 뒷문으로 달아났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가슴이 아파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섬은 닫힌 공간이고 형은 이미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형의 시체가 발견된 유림해수욕장에는 서울시경 형사를 자처하는 두 사람이 전날부터 야영을 하다가 사건 발생 후 섬을 빠져나갔습니다. 물론 승선신고도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또 대전경찰서 형사를 자처하는 또 다른 다섯 명의 형사가 섬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형의 주변에는 우리가 처음 알아낸 안기부 여직원말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배 안의 감시자 세 명, 수사관 일곱 명 등 최소한 열한 명 이상이 짜여진 각본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셈입니다. 흡사 무슨 작전을 펼치듯 말입니다.

안기부는 ‘학생운동조직사건’을 획책했던 게 아닐까

도대체 89년에 왜 공권력이 선량한 대학생 하나를 이렇게 죽음으로 옭아매기 위해 작전을 펼쳐야 했을까요.

형이 죽은 지 10년도 더 지났지만 참으로 많은 선후배들이 형을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형은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낯을 붉히며 싫은 소리를 못하던 스물일곱 살의 예술적 감수성이 넘치던 조소학과 학생이었습니다. 섣불리 80년대를 반성하는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운동권 학생의 강퍅한 심성’ 같은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지요.

89년에 방북사건들이 이어지고, 동의대사건 등이 벌어진 후 노태우 정권은 대대적인 공안탄압을 시작했습니다. 87년 6월 항쟁으로 벼랑 끝에 몰렸던 그들에게는 어떻게든 정국을 역전시킬 계략이 필요했겠지요. 형은 같은 예술대학의 차일환 선배 등이 활동하던 민미련의 ‘민족해방운동사’ 연작걸개그림 제작을 후원했고, 그림은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슬라이드로 전시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차일환 선배는 이미 간첩으로 몰려 고문수사를 받고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었지요. 그 수사에 안기부 인천분실 수사관이 참여해 있었고요. 또 형이 살해당한 8월 15일은 평양에 머물던 임수경 씨가 서울로 돌아오는 날이었지요. 저는 그런 일들이 형의 죽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국가권력은 형을 매개로 조직사건 같은 것을 획책했겠지요. 안기부 요원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전대협이나 학생운동조직의 긴급한 일을 내세워 형을 유인했겠지요.

이제 섬 주민들의 증언과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로 당시에 검찰이 황급히 뒤덮었던 사건의 정황들이 하나씩 드러났습니다. 조사에서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안기부, 현재의 국가정보원은 이 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들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과거와 결별하고 거듭나려는 의지가 있는지 우리는 국정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심스러운 중간발표를 보면서 나는 이미 조사가 훨씬 더 구체적으로 진전되었으려니 짐작했습니다. 물론 아무 근거 없는 혼자만의 추측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마무리지어야 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적잖은 어려움에 맞닥뜨린 모양입니다. 4월 중순으로 한정된 활동기한도 다 돼가고 말입니다. 수사권도 없는 한시적 기구로 출범할 때부터 걱정하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지요. 아무 매듭도 못 짓고 또다시 그 수많은 사연들을 캄캄한 망각의 심연 속에 묻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그런 상황이 두렵습니다.

이토록 명백히 드러난 살인사건조차 자백받지 못한다면 역사의 심판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공허할까요. 다음 세대는 역사로부터 과연 무엇을 배우게 될까요. 형, 저는 또다시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진상규명위원회의 남은 활동을 지켜보겠습니다. 형뿐만 아니라 그 많은 억울한 죽음의 진실이 어떤 결론으로 귀결될지 말입니다.

김성희 참여연대 연대사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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