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0월 2000-10-01   689

게시판, 토론의 장인가 배설의 장인가

인터넷이 처음 보급될 즈음엔 ‘정보의 바다’ ‘쌍방향 의사소통’ ‘정보혁명’ 운운하며 이를 모르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렇듯 보급 초기에는 인터넷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것이라는 긍정성만 강조되었다. 하물며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을 서핑(파도타기)한다고까지 표현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현재는 인터넷 내부가 안전하지 못하다고들 한다. 유연한 파도타기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멋모르고 항해하다간 암초에 걸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근 인터넷에 대한 달라진 인식의 지형도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인터넷을 통한 원조교제에서부터 인터넷이 부정적으로 활용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얼마 전 모언론사에서 게시판에 올라오는 욕설, 험담, 인신공격, 사이버내 성폭력 등을 보도하면서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학부모들은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언론은 PC방이 범죄의 온상이 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시민단체들 또한 ‘낙천·낙선운동‘에서 사이버 여론을 최대한 활용하는 경험이 있었던 반면 게시판에 시민단체의 입장에 대한 근거없는 인신공격이나 무분별한 욕설과 비방 공세가 계속되자 당혹스런 경험을 치러야 했다. 정도가 지나친 게시물의 경우에는 따로 운영자가 삭제하기도하고, 이것을 두고 거칠게 항의하는 네티즌들도 있었다. 현재는 시민단체의 자유게시판 상단에 “근거 없는 욕설과 비방은 삭제합니다” “네티즌들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등의 운영원칙을 밝히고 있다.

‘게시판문화’ 자율적 노력으로 바꿔야

현재 참여연대도 사이버관련 담당자가 아침에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밤시간 동안 올라온 자유게시판의 내용물들을 정리하는 일이다. 이런 예는 다른 시민단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의사폐업, 의약분업 관련해 경실련 홈페이지에는 각종 유언비어, 험담 등이 난무했는데, 한 회원은 “이성적인 토론의 장이라기보다는 ‘배설의 장’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토로하기까지 했다. 최근 참여연대에서는 “관리자님께서는 게시판 정리 좀 합시다. 말도 안 되는 글로 도배하는 게시판을 보니 만정이 떨어집니다(작성자 김태석)” 등과 같이 게시판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아지자 ‘의약분업’과 관련한 글들은 별도로 모아 처리하고 있다. 시민단체는 물론이거니와 인터넷이 강화되면서 생활의 여러 면모가 변화하고 신생 용어들이 탄생했다. ‘해킹’ ‘컴퓨터 바이러스’등 부정적인 컴퓨터 전문관련 용어도 일상어가 되었다. 시민단체들로서는 인터넷을 통한 여론형성과 시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무척 생소한 경험이었다. 인터넷에 대한 이런 일련의 시비는 인터넷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디에 판단근거를 두어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 정보통신부에서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이 입법화되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정통부의 법률 개정이 알려지자 가장 먼저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인터넷 사용과 관련된 경험들이 축적되지도, 시민사회 내 토론의 장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사회 내부의 자율적 노력을 해볼 겨를도 없이 정부가 인터넷 규제를 한다는 것에 대한 논란이 먼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지난 9월 5일에 있었던 27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시민공청회에서 처음으로 이 법안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정통부 관계자가 나와서 ‘통신질서확립법’에 대해 설명을 하자, 시민단체들은 ‘자율등급제’ 조항을 비판했다. 정통부 라봉하 정보이용보호과장은 “아이를 낳아보면 어떤 심정일지 알게 될 것”이라며 인터넷 안의 유해정보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타당성을 주장했다. 이 토론에서 시민단체들은 “말이 자율이지 타율적인 등급제”라고 논박했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인터넷 내용 등급 기준을 정하기 때문에 자율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 이후에 정통부가 청소년보호를 명분으로 등급제를 주장하기 위해서 학부모단체들의 도움과 여론을 얻고자 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는 “정통부가 추진하는 인터넷 내용등급제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정통부가 주선한 모임에 참석했다는 박홍나미 씨(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는 “모임에 참석해서 받은 느낌은 정통부가 기존 법과 다른 점이 거의 없는 법을 입법해 정부 내에서 권한 확대를 꾀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전했다. 정통부가 ‘청소년 보호’를 명분으로 등급제를 시행하고자 하는 것은 인터넷의 내용에 대해 형사처벌의 방법을 통해서라도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겠다는 논리이다. 김기중 변호사에 의하면 “미국과 독일 등에서 형사처벌 등의 강제장치를 도입하려다 실패했다”며 인터넷은 외부의 강제로 규제할 수 없는 특별한 매체라는 점에 대해 국제적인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실효성이 없는 법안을 통과시켜 국내 인터넷산업만 위축시키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정통부는 9월 19일 법을 대폭 수정해 23일부터 입법예고하겠다고 밝혔다. 라봉하 과장은 공청회 당시 원안이었던 법안에 비해 “등급제를 완화했고, 소프트웨어 설치 의무화는 권장사항으로 바꿨다”고 전했다.

정리를 하자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은 이미 1985년에 제정되었다. 그후 시대 변화에 따라 1995년 ‘정보화촉진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이전 법은 효용을 상실하였다. 그런데 정통부는 민간부분의 개인정보 보호와 등급제 등의 규정을 끼워넣으면서 이미 사라졌어야할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 밝힌 대로 정통부가 개정안을 입법 추진하는 데는 부처의 권한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개인정보 보호’는 별개의 독립법을 제정해야

인터넷이 가지는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서 시민단체들 또한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개인정보 보호가 이루어져야 하며, 청소년들을 유해정보로부터 보호하고, 개인 비방·인권침해에 대한 대책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개입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민사회 내에서 자율적인 노력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인터넷을 규제하겠다는 정부의 의도는 지나친 과욕이며 현실에서 실효성이 거의 희박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또한 여성연합의 사이버 담당자는 “‘사이버 스토킹’에 대한 문제는 성폭력방지법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이지, 정통부가 규제할 사안은 아니”라고 입장을 밝혔다. 인터넷의 정보 내용이 방대하고, 국경을 초월해 국제적인 이동이 가능한데 국내법으로 규제하고, 도메인주소 관리권 또한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재 정통부의 개정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등급제와 도메인주소자원 관리권한으로 국한된다. 개정안에는 도메인주소관리권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이런 예는 없다고 한다. 현재 국내 도메인주소관리권은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인 ICANN과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한국인터넷정보센터에서 하고 있다. 앞으로도 한국인터넷정보센터가 자율적으로 국제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해가면서 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 법안은 입법예고 후 20일의 의견수렴을 거치고 국회에서 입법될 예정이다. 이에 공청회에 참가했던 27개 시민단체에서는 “기존의 ‘정보화촉진기본법’은 그대로 두고, 민간부분의 개인정보보호에 대해서는 별개의 독립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단일의견에 합의했다.

윤정은(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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