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1월 2002-01-01   504

상식이 살아있는 2002년을

나는 1960년 서울 신촌에서 녹번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 때는 주변이 온통 논과 밭이었다. 트럭으로 실어온 돌과 흙으로 논바닥을 메우고 다섯 세대가 산업은행의 융자를 받아 이른바 후생주택을 지었다. 이웃이라곤 우리들뿐이었고 불광동 시장에 가려면 불광천에 걸쳐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다리를 건너면 기름집이 있어서 늘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골목 안으로 더 들어가면 옹기점이 있었고 항아리와 독들이 날렵하게 쌓여 있는 하꼬방 위층에 천주교회가 들어 있었다. 그 하꼬방 교회가 오늘의 불광성당이 됐는지 모르겠다.

불광천이 복개돼 그 맑던 북한산 물이 구정물이 돼버리고 겨울이면 연탄재와 김장 쓰레기로 뒤덮이곤 했다. 그때는 전화도 없었고 자가용 승용차는 먼 미래였다. 장마 때면 발목까지 잠기는 진흙탕 골목을 더듬다시피 하며 다녀야 했고, 홍수가 나면 부엌에 개천물이 역류해 그릇이 둥둥 떠다니곤 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들 했다. 그것이 당시 문화인의 삶이었다. 때로는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불광동의 추억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낭만적인 느낌마저 준다. 그때는 최대 20평까지 집을 지을 수 있었지만 30년 뒤 바로 그 터에서 나는 30평 공간에 살고 있다.

6m 소방도로라는 말은 들은 것 같은데 우리 동네 골목길은 소방과는 인연이 없는 좁은 골목이다. 이 좁은 골목길에 연립주택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이 동리에서 사람들은 시집 장가 가고 아이 낳고 직장 다니고 바캉스도 가고 자가용도 몰고 때로는 주차 때문에 다투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새 사람들은 자기 집보다 병원에서 임종을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동리에 상가가 있는지도 모르고, 어느 집에서 딸을 낳는지도 모르고 별 인사도 없이 살아간다. 그래도 아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들은 가게 주인들이다. 그런 가게도 때로는 말도 없이 이사해 버리곤 한다.

골목 아줌마, 아저씨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시민운동을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운동은 이 골목까지는 미치지 않고 있다. 부패방지법, 상가임대차보호법, 사채금리에 관한 법, 삼성전자에 대한 문제제기 등 참여연대가 열심히 하는 일들은 이 골목의 서민들에겐 그다지 다가오는 문제들은 아니다. 그러나 전기세, 가스값, 휴대폰요금, 이면도로 주차문제, 택시요금, 이발요금 같은 일들은 민생과 직결되는 문제들이다. 시민단체들이 국회에 입법 제안을 한다든지,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는 소식보다는 시청이나 구청에서 민생과 관련된 법적 규제를 결정할 때 이들은 더 관심을 갖는다.

어떻게 하면 이 골목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참여연대에서 하고 있는 중요한 활동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짜내보아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부족해서인지 이 동네에서는 자원봉사자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이 동네 사람들이 실감할 수 있는 시민운동이란 어떤 것일까? 골목에서의 시민참여는 무엇을 말하는가?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상관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는다. 그런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질 때 골목 안의 운동이 생겨나는 것일까?

사실 따지고 보면 파출소에서는 동네 순찰을 돌고, 119는 부르면 달려와 위험을 무릅쓰고 인명을 구한다. 별도의 봉사료도 받지 않는다. 그런 일들을 떠나서 좀더 공익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는 규제가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시민운동은 입법청원도 잘 해야겠지만, 이미 너무 세밀하게 마련된 법, 때로는 몹쓸 법일 수도 있는 것들을 고치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법을 지키자는 등대지기의 주장도 들어봤다. 옳은 이야기다. 그러나 법도 보편타당할 때 정당한 것이지 악법은 백해무익이다. 우리 동료들 가운데 총선연대 활동 때문에 옥고를 치르는 이도 있다. 과중한 벌금형을 선고받은 이도 있다. 그러니 선거법은 바뀌어야 비로소 민주주의에 걸맞는 정당한 법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미국 같은 나라에는 법률가가 많다. 국회의원들도 반수 이상이 변호사다. 이들은 법령을 만드는 기술자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또는 바람직한 현대도시를 만들기 위해 많은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겹겹이 에워싼 방어적이거나 예방적인 법률이 오히려 상식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법도 상식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

최근에 필립 하워드(Philip K. Howard)라는 유명한 변호사가 쓴 『상식의 죽음 : 어떻게 법이 미국을 질식시키고 있는가(The Death of Common Sense : How Law is suffocating America) 라는 책을 뒤져보았더니 첫머리 글이 퍽 재미있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테레사 수녀와 당시 뉴욕 시장의 합의에 따라 1998년 겨울 ‘자선의 선교단’ 소속 수녀들이 뉴욕 북쪽 브롱크스에서 불타버린 건물 두 채를 살펴보고 있었다. 선교단은 50만 달러를 들여 이 건물들을 노숙자들의 숙소로 꾸밀 계획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뉴욕시는 선교단의 계획을 허가했다. 그러나 건축법이 문제였다. 현대 건축물에는 반드시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선교단은 현대적인 편의시설을 거부해온 전통을 갖고 있었고, 엘리베이터 설치에 드는 비용만도 10만 달러나 돼 테레사 수녀는 결국 이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테레사 수녀를 탓할 것이 아니라 문제는 법이라고 이 책의 저자는 주장한다. 엘리베이터도 그렇지만 도로의 넓이도 그렇다. 그것이 법으로 제정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급급할 뿐, 감히 질문을 던지거나 다른 의견을 내놓지 못한다. 그것이 상식적 판단이나 인간적인 방향에 위배된다고 해도 말없이 수용한다. 법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법도 상식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상식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새해가 되었으면 한다.

참여연대의 식구들, 그리고 모든 친구들에게 힘찬 새해가 되길 바란다.

박상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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