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1월 2002-01-01   513

‘그래, 페미니즘은 기본이야’

쉰다섯 그리고 스물넷.

처음 데이트를 신청할 때 과연 그들이 30년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전화로 “하시겠습니까” 했을 때 흔쾌히 “예스”해서 주선자로서는 약간 당혹스럽기도 했다.

따끈한 커피 한잔이 간절했던 12월 15일 토요일 저녁 5시, 우린 하자센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영등포 길에 밝지 않은데다 주말정체에 딱 걸린 지하은희 대표와 핸드폰으로 교신하며 가까스로 하자센터에 닿은 시각은 5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지하은희 영등포란 동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장난 아니다, 야.

이다 이 동네가 좀 그래요. 썰렁하죠?

지하은희 이다는 무슨 뜻이에요?

이다 ‘나는 여성임이 자랑스러운 여성이다’의 이다예요. 저는 들꽃모임 초동멤버예요. 나이주의·권위주의 철폐, 반말쓰기, 부모성 함께 쓰기 하는. 저는 지금 여성주의로 숨쉬는 마을 ‘언니네’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랩도 하고 있어요. ‘언니네’ 사이트 들어가 보셨어요?

지하은희 얘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내가 워낙 인터넷세대가 아니어서…. 호호. 우리 사이트도 잘 안 들어가…. 오늘 오면서 난 그런 생각했어. 만나주는 것 자체를 고마워해야 되나? 83년 여성평우회 만들 때 40대 이후 사람은 같이 안 한다 그랬어요. 그런데 벌써 내가 쉰다섯이야, 세월도 빠르지….

이다 일개 딴따라가 선생님을 뵙게 된 게 영광이죠. 하하하. 대학 다닐 때 굉장히 비판적이 되잖아요. 여성주의운동 하는 애들도 자기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알아. ‘들꽃’ 할 때도 그랬어요. 그런데 몰랐던 거죠. 여성주의 판에 대해. 만날 기회가 없어서 벽 같은 게 느껴졌던 건지 몰라요.

지하은희 그건 새롭게 자기주장 하는 세대의 공통점 같아요. 여성평우회 만들 때도 기존 여성운동과는 단절하고 새롭게 시작한다 그랬어요. 우리가 제일 새롭다 그랬으니까. 물론 일제시대의 근우회의 맥은 다시 잇는다 생각했죠. 다소 억울한 건…, 그런데 몇 년부터 운동 시작했어요? (96년이에요) 96년이면 남녀고용평등법, 가정폭력방지법, 영유아보육법 다 만들어진 후거든요? 그럼 그걸 누가 만들었느냐? 직접적 혜택은 보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가 근우회를 관심 갖고 봤듯이 우리를 관심 갖고 봐주면 좀더 이해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이다 우리는 기존 운동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조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정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안별로 연대하면 되죠.

지하은희 젊은 그룹에서는 우리가 다른 운동진영과 함께하는 데 연연해한다고 비판하는 것 알아요. 그런데 운동을 같이 하면서 고칠 건 고쳐야지, 저것들이 우릴 엿먹일 거 아닌가부터 먼저 생각하면 그건 너무 방어적이지 않나. 호주제폐지운동을 하더라도 인간평등을 주장하는 남성그룹을 설득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는 거잖아요.

이다 90년대 중반 여성주의운동의 독자성을 주장하면서 방어적이라도 좋다, 그랬던 게 저는 전략상으로 너무 훌륭했다고 봐요. 그래서 요즘 페미니즘은 상식이야. 아무 관심 없던 애들도 이제 페미니즘 모르면 촌스러워! 그렇게 됐어요.

지하은희글쎄, 그건 더 얘기해보기로 하고. 사는 얘기 좀 해봅시다. 나는 우리 시절의 보통여자들과 다른 편이었어요. 서른다섯에 늦게 결혼했고, 딸 하나 낳고…. 내가 결혼할 때 너무 바빠 애를 안 낳을 수도 있다, 그랬거든. 그런데 결혼생활 하다보면 애기 안 낳는 게 낳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어. 호호호. 이효제 선생님 세대는 아예 결혼을 안 했죠. 그런데 우리세대 여성운동가는 거의 결혼했어요. 남편과 싸우고, 설득하고. 요즘은 어때요?

이다 제가 잘 말씀드리기 어려운 게 저희 나이가 버티면 버틸 수 있는 나이잖아요. 결혼할지 안 할지에 대해선 아직 몰라요.

지하은희 애기 안 낳는 것처럼. 하하하!

이다 이제 곧 결혼문제가 닥칠 텐데…. 여자들은 활동을 해야 하니까 남자를 고를 때 가정적이고, 여성주의에 대해 잘 아는 그런 남자를 선호해요. 급진적인 친구들은 가족제도 자체를 반대하고. 서로에게 유사가족이 돼 주는 거죠. 저희 부모님 들으시면 펄쩍 뛰시겠지만 공동체를 꾸리고 가사분담을 하며 서로 어떤 방식으로 가족이 되어 줄 것인지 세세한 규칙들을 만들죠.

지하은희 지난 제주도 인권학술회의 사건을 어떻게 봐요? 선배그룹이 문제제기했던 건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었어요. 100명 모였는데 꼭 대자보를 붙였어야 했느냐, 직접 관계 없는 얘기를 외부인들이 보는 통로에 붙여서 운동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의 명의도 밝히지 않고 그래도 되는 거냐. 젊은 그룹에선 그게 잘 이해 안되나요?

이다 내부문제를 덮어두려는 식으로 비칠 수 있지 않을까요. 선한 남자와 악한 남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자들을 무의식적으로 비하하는 것도 똑같은 죄라고 생각해요. 아마 인터넷이 있었으면 인터넷에 올렸을 텐데. 내부 문제를 밖으로 알리지 않도록 하자는 말은 매번 나오는 얘기인데, 강철구사건 때도 마찬가지였죠. 노조가 회사랑 싸우고 있는데 빌미를 준다고 하지 말자, 그랬어요. 운동권 내부의 분열로 보이게 한다는데 그건 아니지 않아요?

지하은희 강철구사건은 우리도 문제라고 그랬어요. 또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100인위원회에서 명단을 발표했을 때 그 자체가 문제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단지 공개할 때는 가해자의 얘기도 들어봐야 한다, 물론 나이든 사람의 생각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가해자에게도 인권이 있으니까. 그런 문제제기는 아주 틀린 건가요?

이다 내부에서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이 힘겹게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많은 피해상황이 접수되고 있는데 그대로 이 문제를 꺼트릴 수 없다고 해서 우선 공개하자고 한 거죠. 공개 후, 사건별로 확인작업에 들어가자고 했어요. 막상 활동중인 사람들에게 너희들의 말은 맞는데 방법상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을 택하지 않은 우리는 그 말을 꺼내기도 힘들어할 때도 많잖아요?

지하은희 그건 아니에요. 발표되는 순간 낙인찍히는 건 어쩌냐고? 그걸 문제라고 본 거지.

이다 그 지점에 대해서는 내부에서도 논란이 좀 됐어요.

지하은희 저한테 굉장히 큰 충격을 주었구요. 그게 긍정적인 효과도 줬어요. 운동권 내에서 잘못하면 큰일난다는. 그런데, 이제 여성운동도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태도를 보일 때가 아닌가.

이다 어쨌든 피해자 중심의 인권운동이라는 게 너무 힘들더라구요.

지하은희 맞아요. 그리고 난 운동에서 비판을 통한 실천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지금 20대 젊은이들이 우리더러 당신들은 낡았다 고로 우리가 새로 시작한다, 그렇게 나서주면 좋겠어요. 그런데 실천도 안 하면서 하는 건 못 받겠다는 생각이에요.

이다 비판이 전달되는 소통의 통로가 생겨야 할 것 같아요. 무엇보다 요즘엔 당위성만으로 운동판에서 희생하라 강요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지하은희 그런데 우리 때는 진짜 돈도 못받고 일했다구요. 어떤 때는 그런 생각도 들어. 우리는 돈도 안 받고 일했는데…. 너희는 활동비 받잖아, 물론 적지만. 노동자 평균임금보다 간사 임금이 적어요. 그런데 그걸 참으라고만 할 수 없다, 그건 다 인정하지만 해결방법은 없고. 그래서 아주 괴로워요.

이다 저는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속도가 느껴져요. 주변의 아버지나 남자애들이 쓰는 용어가 달라지고, 아줌마운동도 활발하고, 레즈비언운동도 활동적이고. 다만 페미니즘이 너무 당연해지면서 이론에는 빠삭한데 실천은 안 하는 남자들이 많아져서 문제예요. 그러면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문제죠. 페미니즘은 상식이야! 그런 부분에 대해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지하은희 알게 모르게 페미니즘이 확산된 거, 여성들의 권리찾기의식이 발전된 거 너무 좋아요. 다만 개인적인 염려가 있다면 페미니즘 담론이 너무 성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오히려 구조적인 여성노동자의 문제에 관심 가졌으면 좋겠어요, 세계화라는 패러다임이 판치는 상황에서 여성의 비정규직 비중이 60%∼70%가 넘는데도 아무도 손도 못 대고 있어요. 이런 건 젊은 그룹과 선배들이 같이 해야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담론을 형성하고. 그게 안 되면 오히려 여성 내에서 계층 간의 갈등이 증폭될 수 있어요. 요즘도 페미니스트들은 중상층 이상 여자들의 권리찾기다, 그런 비판 있잖아요. 실천하지 못하면 그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 같이 합시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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