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1월 2002-01-01   1987

판차실라로 가린 수하르토 인권탄압 32년

1982년 5월 스위스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초행길이라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바틱의 나라’, 인도네시아의 첫인상은 이렇게 다가왔다. 바틱은 인도네시아 특유의 물감. 서민들의 옷, 건물, 장식 등 곳곳에서 강한 색감의 바틱을 만날 수 있었다.

뭐랄까, 짙은 흑색과 갈색의 조화. 그리고 남자들 대부분이 콧수염을 기르는 것도 눈에 띄었다. 무슬림의 나라. 그러나 기독교·천주교·힌두교·불교의 화합을 위해 판차실라(pancasila)라는 국시(國示)를 내걸고 종교 간의 협력을 이끌어 내어 권위주의에 입각해 나라를 이끌어간다고 하면 잘못된 표현일까? 판차실라는 신의 섭리 아래의 인도네시아, 정의로운 인본주의, 국민의 화합, 인도네시아의 지혜에 의한 민주주의, 국민을 위한 사회정의, 이 5가지로 이뤄진다.

인도네시아는 아시아 강대국의 하나다. 지하자원, 인구, 국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아시아 4번째의 대국으로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자바, 수마트라, 칼리만탄, 스라베시 그리고 티모르, 이리얀자야 등의 큰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는 2억1500만 명. 아시아에서 중국, 인도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인도네시아가 서구에 알려진 것은 1498년, 네덜란드가 향료무역을 위해 인도로 가다 처음 발견하면서부터다. 물론 인도네시아 중 암본을 주정부 서울로 하는 마록칸 지역은 포르투갈이 이미 1511년 기지를 건설해 세력을 확장했고, 이어 동티모르를 식민지화했다. 포르투갈은 이어 마카오까지 점령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기독교 원리에 바탕한 근대국가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청교도의 나라 네덜란드가 무슬림의 나라 인도네시아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어를 서양 알파벳을 이용해 근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아시아 언어 가운데 인도네시아어는 서양인에게 매우 친숙한 언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2년 간 인권탄압 자행한 수하르토

인도네시아는 다른 제3세계 국가들처럼 제2차 세계대전 뒤 독립국가가 된다. 400여 년 간 식민통치하던 네덜란드가 물러간 뒤 수카르노가 교조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나라를 다스리다 1967년 군사쿠데타로 실각했다. 수하르토는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로 나라가 어지럽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인도네시아 Take off”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6번의 연임과 32년 간의 장기집권으로 영화를 누리던 그는, 1998년 5월 12일 자카르타 트리삭티 대학교 학생 4명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져간 국민들의 항거로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인권 탄압, 부정부패, 동티모르 침략, 이리얀자야 침략, 아체주의 독립 기도 탄압 등 도처에서 저지른 인권유린에도 불구하고 수하르토정권이 32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 강대국들이 인도네시아의 경제발전모델을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있는 한 인권 유린이나 환경 파괴, 그리고 어느 정도의 부정부패는 용납되어야 한다는 이론에 따라서 말이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인도네시아를 20세기의 성장모델이라고 비판한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통치이념은 앞서 말한 판차실라이다. 이 통치이념은 거의 모든 덕목을 망라하고 있어서 이대로만 된다면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을 게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수하르토정권은 무수한 인권탄압을 자행했다. 동티모르 등 많은 지역에서 소수민족을 학살했다.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도 무자비했다. 자신에 대한 비판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잘 훈련된 군부가 많은 특혜를 누리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수하르토의 독재정권을 뒷받침했다.

수하르토 정권은 친인척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의 아들과 딸, 그리고 사위들이 부정부패와 비리로 축적한 부는 천문학적 규모였다. 국민의 원성이 가장 높았던 것도 수하르토를 비롯한 통치그룹 가족들의 부정 문제였다. 그런 부정부패도,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유린도 경제성장 논리 아래 정당화됐다.

유엔 개발 프로그램 당국자나 서방 강대국들은 앞다투어 인도네시아의 모델을 모범답안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그런 `모범국가 인도네시아를 이끌던 수하르토 정권은 1998년 5월 14일에 일어난 대규모 국민시위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국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독재자의 하야를 외치고 있을 때 수하르토는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대통령과 정상회담중이었다. 5월 15일 급히 귀국한 수하르토는 “곧 총선을 실시하고 전 장관을 경질하고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즉각 하야를 요구하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과도기 대통령인 (자기 밑에서 부통령을 한) 하비비에게 장관 몇 사람의 임명권만 주면 퇴임하겠다고 권력을 구걸하였다. 마지막에는 사위인 수비안도 준장과 자카르타 수도 경비사령관을 시켜 국민의 데모를 중국계가 조직했다는 조작된 소문을 퍼뜨리고 민심을 호도하기 위해 수백 명의 중국계 인도네시아 여성이 집단강간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다. 우리는 궁지에 몰린 독재 정권의 잔악성을 인도네시아에서 만나게 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재임시의 국회구성을 살펴보면 박정희 정권 때의 유신국회보다 더 설득력이 없다. 우선 550명의 국회의원 중 420명이 지역에서 선거로 당선되며 75명이 군소정당 몫이고 55명이 군인대표다. 국가대표위원회는 550명의 국회의원과 81명의 도의회 의원, 69명의 사회·종교·문화 대표 등 총 700명으로 구성된다.

등록된 3개의 정당만이 선거에 입후보할 수 있어 결국 집권당인 골카르(Golkar)당, 인도네시아민주정당(PDI), 그리고 개발연합당(PPP)의 3개 정당만이 선거에 참여했다. 사실상 이 제도는 진정한 야당의 진출을 차단하고 골카르당이 영구집권을 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제도를 개혁하는 일은 메가와티 현 대통령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새 대통령 메가와티는 수카르노 전 대통령의 딸로서, 전임자 와히드 대통령이 부정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어 탄핵당한 뒤에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가장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기에 그만큼 책임도 막중하다고 하겠다. 그는 국민화합을 이루면서 다수정당제를 허용하고 부정부패를 뿌리뽑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지나간 50년 간 온갖 특혜를 누려 온 군부를 어떻게 장악하느냐 하는 무거운 책무도 짊어지고 있다. 아직도 구제금융사태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제를 어떻게 살리느냐 하는 것도 큰 근심거리다.

무궁무진한 천연자원을 자랑하는 인도네시아는 지도자만 잘 만난다면 진정으로 도약(true take off)할 수 있는 나라이기에 우리는 깊이 연구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겠다. 인도네시아의 국민도 어느 나라 못지않게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있기에 우리와 그들의 경험을 서로 교환하는 프로그램을 우리 NGO가 마련했으면 한다. 다음 호에서는 동티모르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박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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