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10월 2012-10-08   1313

[여는 글] 가을, 소통의 계절

 

가을, 소통의 계절

이석태 참여연대 공동대표

 

가을이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집 주변의 나뭇잎이며 풀들도 조금씩 모습을 달리해 간다. 짐을 가볍게 하고 걷는 것 자체로 기분 좋은 시간이 눈앞에 있다. 책이 가깝게 느껴지며, 좋은 음악을 듣고도 싶어진다. 누가 가을에 생각나는 영화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문정숙, 신성일이 출연한 이만희 감독의 1966년 영화 <만추>를 들고 싶다. 일전에 그 필름이 영상 기록으로 국내에 보존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아쉬움이 컸다.   

  영화 얘기를 덧붙이자면, 지난 9월 8일 베니스 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상을 받는 순간 청계천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구리 박스를 들고 다니던 열다섯 살 내 모습이 생각났습니다.”라는 김 감독의 수상 소감이 찡하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청계천 주변 공장 등에서 입대 전까지 일했다고 한다. 그 이력을 듣고 폭력적 이야기가 잦아 감상이 쉽지 않은 김 감독 작품들의 배경이 이해가 되었다. 재벌 2세가 매 한 대에 백만 원을 지불하겠다며 야구방망이로 화물차 운전사를 구타한 사건이 보도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기막힌 현실이다. 김 감독의 신산했던 삶의 경험이 돈을 중심으로 하는 비틀린 사회의 이면을 영상으로 담아내게 한 듯하다. 김 감독의 영화는 그가 체험한 소외의 기록이자 부조리한 일상에 대한 고발로 읽힌다.     <피에타>는 김 감독이 세상에 던지는 소통의 메시지이다. 

 

소통은 마음을 여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여러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래요’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아니요’ 하며 눈썹을 찡그리기도 한다. 인도의 구루들은 침묵을 통해 각성의 은전을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소통은 대개 말을 통해 이루어진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 성경의 요한복음 구절은 우리 삶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근원적 성격을 보여주는 예일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는 명제를 남긴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믿지 못하면서도, 의심하는 마음mind의 존재는 인정했다. 다만 그는 몸보다 마음을 우선시하였는데, 몸을 자신의 시대에 유행했던 자동인형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자기 마음 바깥의 대상을 부차적으로 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생각은 이후 많은 비판에 부딪쳤지만, 특히 언어의 속성과 관련한 비트겐슈타인의 논박이 흥미롭다.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은 가상의 말을 ‘자기만의 언어private language’라고 하였는데, 이는 말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언어는 그에 대응하는 대상을 필요로 하고, 우리의 생각 또한 언어이므로 대상을 전제로 한다. 언어와 대상과의 관계는 언어의 용례에 의하여 정해진다. 예를 들면 ‘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용례에 의해 잘 알고 있듯이 글이 쓰여진 일정량의 종이 제본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누군가 식탁 위의 ‘꽃병’을 보고 책이라고 우긴다면, 그는 아마도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즉 언어의 속성상 우리는 ‘자기만의 언어’를 가질 수 없고, ‘데카르트의 생각’ 또한 자기 밖의 다른 사람들과 공유된 언어로 나타나야 한다. 요컨대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언어로 얻은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 우리는 이따금 삶의 의미를 곰곰 되새겨 보게 된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차용한다면, ‘사람은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은 소통의 동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사이의 소통에 문제는 없는가. 당신과 나 사이에 풀지 못할 오해는 없는지. 가정과 사회에서의 소통은? 안철수 대선 후보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세 가지 과제를 복지, 정의, 소통이라고 하였다. 좋은 소통은 양보다는 질의 문제라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좋은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어느 정도 사전의 앎이 필요하다. 공감과 경청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배려와 관심이 더해지면 소통의 수준 또한 높아질 것이다. 속으로 딴생각을 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겉치레의 소통은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쉰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글에서 “사람을 무는 개라면 물에 빠졌건 안 빠졌건 간에 무조건 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20년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중국 사회에서 정의의 확립을 우선시했던 글이다. 루쉰이 살던 사회와 현재의 우리 사회를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 사회에 이제 ‘페어플레이’가 널리 일반화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모든 면에서 질적으로 성숙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대선 후보자들 간의 경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각각의 정책이 바람직한지,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은 갖추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아울러 이 가을에 우리가 종종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언가 소홀한 적은 없었는지 소통의 관점에서 성찰해 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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