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9월 2000-09-01   889

즐거워야 문화다

웹진 · 테크노로 무장한 문화게릴라들

2000년대 문화운동은 그것을 게릴라적인 형식으로 보건, 다원주의적인 마니아 트렌드로 보건 간에 주류의 문화적 조류와는 분명한 거리를 갖는 다양한 하위 문화적인 움직임이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운동’은 자신을 프로파간다하고, 사회적인 실천을 수행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연유로 2000년대의 문화적 경향을 딱히 ‘문화운동’이라 부르기에는 모호한 점이 많다. 다시 말해, 홍대 앞의 클럽들에서 출발한 클럽문화 혹은 펑크는 과연 무엇과 갈등하고 싸웠는가? 무엇이 2000년대적 문화운동인가 개념부터 잡아야 이야기가 시작될 듯한 난점.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해 보는 것은 어떤가? 아주 담백하고 단순하게, 80년대의 문화운동들이 포괄하지 못했던 영역에서, 당대의 주류 문화와 갈등하거나 부딪쳤던 것들이라고 말이다. 이 글은 그런 관점에서 몇몇 사례들을 나열해 보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오타쿠’를 아십니까?

80년대의 경향을 아래로부터 무너뜨린 경향이오타쿠문화다. 누구누구가 오타쿠(마니아 문화)의 첨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기의 취향과 스타일을 갈고 닦으며 즐길 뿐이다. 이들은 진짜 게릴라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제도적이고 주도적인 경향들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면서 사안별로 싸우거나 숨는다. 90년대 마니아 문화의 핵심적 모델은 일본 애니메이션 오타쿠들이다. 이들은 PC통신 시절부터 일본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은밀히 즐기고 소통했다. <토토로>에서 <원령공주>까지의 미야자키 하야오, <아키라>의 오토모 가츠히로,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 등등이 그들의 목록이었다. 거기다 <18禁 OVA>까지 하면 대충의 목록들이 완성된다. PC통신에서는 전문적으로 이들의 비디오 테이프를 공급하는 업자들이 생겨났고, 일본문화의 개방논쟁은커녕 말도 꺼내기 힘든 상황에서도 수많은 팬들이 생겨났다. 이것은 일본음악 마니아들도 마찬가지. 엑스저팬 팬클럽은 지금도 막강한 단결력을 발휘하는 거대한 팬클럽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문화운동인가? 이들은 한 번도 머리띠 묶고 종로 바닥을 행진하며 마니아 운동이라는 것을 해 본 적도 없고, 집회를 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마징가Z>부터 공공연히 일본만화(그것도 핵심은 결여된 저질 TV 시리즈들이 대부분인 것들)가 방송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일본문화 수입이 금지된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투쟁이었던 것이다. 작금의 일본문화 개방이라는 상황을 이끈 저변에는 이들이 형성한 토대의 힘이 크다. 어쨌건 이들은 문화적 다원주의와 80년대식 중앙집중적인 체계 같은 것과 무관하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막가는 언론, 웹진

인터넷과 문화운동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일상화되기 시작한 인터넷은 웹진이라는 형식을 만들어냈다. 누구나 손쉽게 인터넷의 한 공간을 공적인 미디어로 전환시키는 힘은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이들을 웹진 편집자로 만들었다. 게시판이라는 어쩌면 공사가 뒤섞인 비공식적인 영역이 공식화되는 과정이었다. 제도적인 지면에서 볼 수 없었던, 문체들과 가공할 공격성 발언과 주장들이 등장했고, 새로운 소통의 표현방식들이 부상했다. 이런 웹진들은 쌍방향 미디어의 힘을 타고 대중과 호흡을 함께하며 확산되기 시작했다. 2세대 웹진의 선두라 할 수 있는 『딴지일보』와 김어준이 그 대표적인 모델이다. 그는 엽기라는 주변부 코드를 대중화시키고, 『조선일보』를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했으며, 욕설을 사용한 글들에 공공성을 부여하고, 대통령 이하 정치인들을 우스개로 만들어 놓았다. 흔히 패러디라 불리는 형식을 빌어서. 어찌되었건 『딴지일보』와 그의 실험은 성공했고, 차갑고 논리적인 비판이나 허무한 농담 이외에도 새로운 길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케 했고, 좀더 나아가서는 대안적인 언론, 소비자 중심적인 글쓰기 같은 의미심장한 것들을 눈에 보이는 과정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하위문화운동의 성격을 띠고 부상한 조류가 아닌가 싶다.

클럽문화 : 펑크에서 테크노로

홍대라는 특정한 공간이 생산하기 시작한 클럽문화라는 코드는 90년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경향이다. ‘개방적 클럽 연대’라는 묘한 조직을 기억하는가. 홍대 앞의 라이브를 시도하는 클럽들이 권익보호와 클럽문화 창달을 위해 만들었다는 조직. 1995년에 생겨났다. 이들은 한국에서도 ‘펑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생존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줬다. 1, 2년 사이에 ‘드럭’을 위시한 10여 개의 라이브 공연 중심 클럽들이 생겨났고, 크라잉너트나 노브레인 같은 인기(?)밴드들도 탄생했다. 거리 콘서트가 가능할 정도의 팬을 형성했으며, ‘마스터 플랜’의 주인 이종현 같은 이는 언더 그라운드 밴드계의 대부이자, 비평가로 대중매체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주류 대중음악의 균질성에 어느 정도 다양성을 부가하고, 대중음악의 장르적인 폐쇄성 즉 댄스, 발라드가 지배하는 시장 구조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음반 레이블과 독립적인 유통구조의 실험도 있었다. 김종휘 같은 이는 ‘인디’라는 레이블을 만들고 독자적인 유통망 형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방향에서의 그야말로 놀라운 경향은 최근 테크노 바의 확대로 그 모양새를 확장한다. 스타급 DJ들은 밤새 홍대 앞의 테크노 클럽에서 믹싱하고, 사람들은 춤을 춘다. 이제 홍대 앞은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실험하는 공공연한 장이 된 듯하다. 이들 중 다수는 이미 그 노하우로 거대한 이벤트나 공연들에 개입하고 공연문화 자체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기도 하다. 특별히 물리적인 투쟁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들 역시 하나의 흐름이 되어 무언가 바꾸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외에도 독립영화집단이나 공연집단, 미술 등의 장르에서도 기존의 경향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모습을 보이는 90년대만의 특징적인 집단이나 개인들, 그리고 경향들이 존재한다. 동성애운동 같은 것도 아주 분명한 예. 그리고 여기에는 어김없이 ‘평론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개입하기도 한다. 이들은 이론적으로 이런 흐름에 의미부여를 하고 공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90년대는 하나의 행위가 하나의 글에 의해 지지받는 묘한 지식인적인 문화운동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이것은 다원주의와 스타일의 차이, 그리고 개인차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강력하게 어필하면서 무언가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다름을 인정하는 어떤 흐름을 만든 것, 그것이 바로 2000년대 새로운 문화흐름이 기여한 바라 생각된다.

손동수 문화비평가 · 월간 DOTZ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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