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9월 2000-09-01   932

가족이 뭐길래

엥겔스가 그랬던가. 가족이란 사적 소유의 기본단위에 불과하다고. 처음 이 내용을 접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실로 충격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격언에서부터 사선을 넘나드는 온갖 시련 끝에도 마침내 ‘가족만세’로 돌아가는 대부분의 헐리웃 영화에 이르기까지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메시지들은 나에게 언제나 아름다웠다. 현실에서든, 영화 같은 가상에서든 우리는 그런 확인을 통해 얼마나 가슴 뿌듯해하고 안심이 되었던가. 그 동안 우리에게 가족은 곧 신성이었고, 절대가치였다. 도덕과 윤리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족은 마지막 남은 희망이자, 유일한 피난처라는 믿음이 흔들릴 여지는 추호도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족의 가치를 ‘회의’하는 것조차 대단히 불온한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족은 과연 그 자체로서 신성불가침의 절대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물음과 회의는 과연 불온한 것인가? 새삼 이런 질문을 다시 던지는 까닭은, 엥겔스의 진술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최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진 가족과 관련한 두 가지 사건이 던져준 충격 때문이다. 첫 번째는 소위 ‘광주파출소장 사건’이고, 두 번째는 이산가족 상봉이 그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딸이 엄마를 여론재판하면서 세간에 드러난 ‘광주파출소장 사건’에서 간통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부분 외의 전말이 속속 드러나게 되면서 나는 전율하였다. 선생님의 이사를 돕겠다고 온 어린 제자를 성폭행한 스승, 그로 인한 임신, 번민 끝에 ‘선택’하고만 성폭행범과의 결혼, 순탄치 못했던 가정생활, 거듭되는 남편의 구타와 의처증, 그러면서 이십여 년이 넘는 동안 괄호로 묶인 여 파출소장의 인생. 이렇게 기구한 사연들은 딸이 엄마를 고발한 내용에는 빠져 있는, 이면의 사실들이었다. 성폭행으로 임신하여 태어난 아이가 바로 고발의 당사자인 그 딸이었고, 저간의 사정을 엄마를 통해 딸이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 큰 혼란에 빠지게 했다. 더구나 “엄마가 가족을 배신하고 가정을 파괴했기 때문”이라는 딸의 격앙된 노여움을 보면서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리해야 할지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과연 딸인 그녀가 말하는 가족이란 무엇이었는지, 그 실체가, 그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묻고 또 묻고 싶었다. 가족의 이름 뒤에 가려지고 있는 수많은 폭력, 가정이라는 신성 아래 숨겨지고 있는 수많은 한숨 섞인 사연 – 인천가정폭력사건을 보라 – 들과 가족은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지켜져야 할 가치이고, 가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되어야 할 가치라는 것이 어떻게 동시에 병립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 그런데 이런 회의를 다른 한편에서 뒤집는 일이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을 지켜보던 내 안에서 벌어졌다. 불과 세 살 때 헤어진 동생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매, 열세 살 때 헤어진 아들이 이제 반백의 머리로 구십을 바라보는 엄마 품에 눈물로 절규하면서 파고드는 모습, 노환 때문에 50년 만에 돌아온 자식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모습, 눈물 없이는 차마 지켜볼 수 없는 그 안타깝고 가슴 아픈 광경을 보면서 나는 또 되물었다. 도대체 가족이, 핏줄이, 가정이란게 또 무엇이란 말인가. 상봉의 당사자는 물론, 이들을 지켜보던 안내원이나 취재를 나선 리포터들조차 눈시울이 붉어지고 슬픔에 못 이겨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각자 살아온 날들의 회한이 저렇게 나타나는 것일 게야, 그저 그뿐이지, 50년을 서로 헤어진 혈육이 무슨 나눌 정이 있겠어, 라고 나는 애써 생각했다. 아니 그리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주체할 수 없는 회한이, 큰 돌덩이 같은 응어리가 가슴 속을 내리 누르는 듯하니 가족이란 우리에게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keen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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