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9월 2000-09-01   1245

글 짓고, 농사 짓고, 마음 짓는 자유인

무주군 광대정 마을 초보농사꾼 한상봉

해발 500m 산꼭대기. 비포장 돌길에서 오토바이 뒤꽁무니는 ‘스카이콩콩’처럼 통통 튄다. 옥수수밭과 고추밭을 지나 꼬부랑 고갯길을 2단 기어로 엉금엉금 기었더니 이내 작은 마을이 시야에 잡혔다.

“다 왔죠?”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에 사는 초보농사꾼 한상봉 씨(38세).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담배 한대 피우고 올라가려구요.”

깨진 유리알 안경 너머로 귀엽고 작은 눈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올라갈 걱정보다 내려올 일이 태산이었다. ‘차라리 등산화를 신고 걸어올 것을….’

백일홍, 목화, 빨갛게 익은 고추… 작은 꽃밭이 있는 마당, 삐걱대는 툇마루에 앉아 덕유산 자락을 바라보니 진땀빼고 올라온 산길이 그저 고맙게만 느껴진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 것. 이해하시라∼.

예전부터 산이 깊어 화전민들이 모여 살았다는 광대정 마을. 그 깊은 골짜기엔 꼭대기 한 집을 제외하고 딱 네 채가 붙어 있다. 한상봉 씨의 집을 중심으로 아래윗집엔 처녀가 제각기 살고, 초입엔 아이들을 데리고 부부가 산다. 10분을 내려가야 우편물을 받을 수 있고, 전기는 들어오되 달빛으로 가로등을 대신하는 산중턱. TV, 라디오, 인터넷 없이 사는 젊은 사람들. 무슨 사연이 있지 않고선 이런 곳에 살 일이 있을까? 그는 맞장구친다.

“귀농자들이 모여 사는 곳은 여기밖에 없을 거예요. 80∼90%가 운동권 출신이죠. 누구는 해방구라고 부르기도 하대요. 그런데 여기도 다 사람 사는 데라 갈등도 있죠. 한 5∼10년만 버티면 어디 가서도 인간문제 잘 해결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곳은 마치 이웃관계를 풀어가는 방법을 배워 마침내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학교 같아요.”

다들 개성이 강해 간섭받기 싫어하고 자치적인 삶을 원하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살며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단다. 처음엔 품앗이를 하자, 생태마을을 만들자,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지만 다 그만두기로 했다. 시간과 여유 있는 사람은 남의 농사를 돕고, 안 도와준다고 섭섭해하지도 말지어다. 그저 각자 마당에 꽃 심고, 길목을 잘 쓸면 마을은 자연히 좋아지게 돼 있는 법이라고.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냐고 한상봉 씨는 되묻는다.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작년 추석 귀농해 진도리에 살고 있는 한상봉 씨. 그는 빈민탁아, 미싱사, 서점 판매원으로 일 해온 부인 유현희 씨(34세)와 의식을 공유하며 둘이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귀농’을 선택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귀농했지만 그는 여전히 바쁘게 산다. 가톨릭 잡지 『공동선』 편집장 겸 대안학교 푸른꿈고등학교 역사교사 겸 농사꾼. 일복이 많은 사람은 궁벽한 산촌에 묻혀도 일이 따라다니나 보다. 유일한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를 몰고 전화를 활용해 이 일들을 모조리 해내고 있다.

우선 『공동선』편집장. 전화로 청탁하고, 속달 우편으로 교정을 본다. 애당초 서울을 떠날 때 편집장 명패를 반납했지만 그걸 기꺼이 받아들 다음 타자가 없었다.

“『공동선』은 기본적으로 진보를 표방하고, 사회문제에 대해 명확한 관점을 갖는 가톨릭 잡지예요.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월급도 제때 못 주니까 사람 구하기 참 어렵더라구요. 저까지 대책없이 내려와 버려서 한 호를 휴간했죠. 그랬더니 선배들이 전화하대요. 책임지라고. 그래서 그냥 계속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상근하는 후배가 다 알아서 하고 전 그냥….”

푸름꿈고등학교 역사교사는 얼떨결에 맡게 돼 지난 학기부터 강의를 하고 있단다. 그는 자신이 국사와 세계사 선생을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사학과’를 졸업했기 때문이라고 귀띔한다.

“국사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둬 제가 급하게 그 뒤를 맡게 됐어요. 솔직히 교회역사는 제가 좀 압니다만, 일반역사는 문외한이에요. 게다가 전 N세대와 소통한 적도 없어요. 그래서 좀 갑갑하지만 미래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고 그들과 호흡하려 해요. 지난 학기 때는 ‘History of My Life’란 주제로 강의했어요. 여러분의 삶이 모이면 그게 바로 역사다라는 거죠. 리포트를 내라 했더니 반밖에 안 냈더라구(하하하). 자유학교 비슷한 분위기라 교사생활도 힘들더라구요.”

마지막으로 농부.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자립적 삶을 추구하자! 이것이 초보농사꾼 한상봉 씨 부부의 결의였다. 농사지어 큰돈 벌 만큼 땅의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그들은 자급자족농의 지향을 갖자고 의견일치를 본 것. 그러나 농사일은 밭 고르기부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농사짓던 땅은 그래도 괜찮은데, 휴경지는 돌 골라내야지, 웬 찔레가 그렇게 많아? 아주 여기저기 안 찔린 데가 없어요. 내년부터는 논농사를 늘리려고 해요. 밭은 경사진 데라 기계로 하기도 어렵고, 또 밭일은 일일이 손을 봐야 돼서 너무 힘들어요. 차라리 논이 쉬워요.”

논 500평, 밭 250평. 둘이서 농사짓는 평수다. 밭에는 고구마, 감자, 땅콩, 당근, 녹두 등 종류별로 다 심었다. 첫농사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감자는 1박스를 심었는데 무려 15박스나 거둬들였다. 그 걸로 그 동안 신세진 사람들과 함께 첫수확의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엉덩이에 굳은살 박인 자는 미래가 없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무국장, 가톨릭 노동사목위원회 간사 , 격월간 『공동선』 편집장 등 주로 천주교운동진영에서 일하던 활동가 겸 칼럼니스트, 한상봉. 30년이 넘도록 근린시설을 갖춘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 밤이 되면 달빛으로 사물을 식별하며 오토바이로 30분은 가야 대중교통수단이 있는 산골에서 세상정보와 두절한 채 무슨 재미로 살까. 그는 씨익 웃는다.

“사람들은 저에게 세상과 단절하고 산다고들 하는데, 여기가 바로 세상의 축소판이에요. 다만 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서 그렇지. 그리고 때로는 세상과 좀 떨어져 있는 것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거예요. 소란함 속에서 조용히 구두를 깁는 노인을 우리가 욕할 수 있습니까? 때가 되면 도시로 가겠죠. 또 때가 되면 시골로 오고. 지금 생각 같아서는 필리핀이나 베트남에 가서 살까 해요. 의식이 성장한 만큼 상대에게 나눠주고. 산다는 건 꾸준히 배우는 거잖아요.”

그는 『공동선』 39호 ‘열린창’ 칼럼에서 불가의 진리를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길 떠나는 자를 운수납자(雲水衲者)라 부르는 것도 이유가 있다. 길 떠나지 않는 자는, 툭 털고 일어설 줄 모르는 자는, 그래서 발바닥이 아니라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인 자에겐 미래가 없다. 흐르지 않는 것은 부패하게 마련이고, 머무름이 오랜 자는 떠남이 곧 인생임을 망각하기 쉽다.”

봄에 뿌린 씨앗이 어느 새 싹을 틔워 아침마다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을 볼 때 생명의 힘찬 기운을 느낀다는 무정부주의적 협동주의자. 같은 사랑의 깊이로 세상과 인간을 생각하면, 어느 새 우리는 상생의 기운을 삶의 결에 틈틈이 박을 수 있다는 그는 곶간문 차받침에 중작을 따라주며 잃어버린 단어인 ‘행복’을 찾자며 하얀 이를 드러낸다. 꿈꾸는 자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 산골짝에 흙집 짓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멋대로 사는 그가 바로 자유인이다 싶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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