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8월 2000-08-01   850

아름다운 정치를 꿈꾸며, 왼쪽으로 그리고 자유로이!

Das Herz schlagt links의 한국어판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 더불어숲 펴냄

지난해 3월 11일 독일 사민당 당수 오스카 라퐁텐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을 때, 핵심적으로는 독일 연방정부의 재무장관직을 내놓겠다고 했을 때, 난 착잡했다. 그가 독일연방 의회의 제1당 당수여서도, 경제강국 독일의 재무부장관이어서도 아니었다.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거물 정치인으로서 신자유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한 아름다운 정치인의 ‘퇴장’이어서 가슴아팠다.

라퐁텐이 맞섰던 문제는 인류 전체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가 지난해 가을 펴낸 『Das Herz schlagt links』의 한국어판이 지난달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진중권 옮김, 더불어숲 펴냄)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나는 ‘정치인이 쓴 책은 읽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바로 책방으로 가서 이 책을 샀다. 솔직히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라는 책 제목의 수사학적 매력이 독서욕을 자극한 측면도 컸다.

사민당 내 원론적인 싸움에 관한 책

라퐁텐은 머리말에서 책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한다. “이 책은 나의 회고록이 아니다. 이 책은 사민당 내의 근본적인 싸움에 관한 책이다.”

그의 사퇴의 변 – “정치적 결단으로서 장관직 사퇴는 민주주의 문화의 확고한 구성요소다. 장관은 단지 언론매체가 그의 실수를 트집잡아 그를 궁지로 몰아넣을 때만이 아니라, 정부 수뇌와 정부의 정책과 더 이상 의견을 같이하지 않을 때에도 사퇴해야 한다.”

그의 집필동기 – “하필 사민당이 이끄는 연방정부 아래서 독일연방공화국이 처음으로, 국제법을 무시하고 헌법에도 부합하지 않는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참아주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적녹연합이 신자유주의로 급진적인 진로변경을 하여 선거공약을 파기한 것에 반대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사민주의자들은 피고용인, 실업자와 세입자의 관심을 대변할 때에만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정치적 다수를 얻을 수 있다. 기업의 영역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소기업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 우리(사민당)는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공약을 가지고 선거에서 이겼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사민당은 제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선거권자의 의견을 국회에 반영시키는 위임을 받은 것과, 사회민주주의 당수가 사회민주주의자인 연방수상과 근본적으로 대립을 추구할 수는 없다”며 조용히 물러섰던 그가, 독일연방정부의 세르비아 폭격과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 등 ‘탈좌파노선’을 목도하고는 더 이상 ‘한 배에 선장이 두 명일 수는 없다’며 마냥 뒷전에 물러서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을 ‘빌리 브란트의 후임’이라고 소개하는 라퐁텐에게 정치란 무엇일까? 그는 정치란 이런 것이라고 명확하게 개념 규정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정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많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안정과 자기 삶을 계획할 시간의 여유를 주는 정상적인 노동상황은 현대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성과 중의 하나이다. 미래의 노동상황을 어떻게 전망해야 하는지는 정치의 핵심적 문제이다. 여기서 인간성과 휴머니티가 현대사회의 기반으로 남을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독일의) 노동자들은 공장 임직원들과 같은 자리에 있었고, 때문에 공동책임 및 공동규정의 권리가 주어졌다면, 이제 이들은 한 작은 임금지불 요인으로 축소되어 버린 것이다.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정규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 기한이 정해진 피고용자들은 일을 하면서 항상, 자신의 고용계획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말만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일종의 복종이 생겨난다. 검열 메커니즘은 언뜻 보면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인간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사실과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이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이다. 정치는 인간의 자유 확대에 복무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대이고, 연대성의 강화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사회적 모티브’와 ‘생태학적 모티브’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이 현실적으로 “정치를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선택된 정부와 의회가 아니라 국제적인 투자가들이다”. 그리고 “국제금융시장을 더 강력하게 규제하지 않고서는 사회 민주주의 정치의 가능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해결의 열쇠는 단기적인 자본 거래의 규제다”.

“세계자본시장의 자유화는 정치적인 결정이다”

라퐁텐은 1980년대에 실시된 세계자본시장의 자유화는 불가항력적인 시대적 대세가 아니라 ‘정치적인 결정’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독일을 비롯해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청년실업 문제는 경제적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성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단언한다. “실업자 수가 계속 증가한다면 경제정책과 금융정책은 잘못된 것이다. 그밖의 모든 것은 실업을 당하지 않았거나 고용이 부족한 현존 경제시스템 속에서도 잘 먹고 사는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이데올로기적 농담일 뿐이다.” 그는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가며 함께 일할 것인가?’

그가 내놓은 정책대안은 명확하다. ‘직업교육을 실시하지 않는 자들에게 공과금을!’

그는 또 “환경세는 사회보장분담금의 결손을 보충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1500마르크 이하의 수입을 최저임금으로 정해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사회보장분담액을 감면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생태주의적 조세개혁을 사회적 연대성 문제와 연동시키겠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슈뢰더와 영국의 토니 블레어가 주문 외듯 하는 ‘제3의 길’식 현대화 프로젝트란 임금동결, 사회보장의 축소, 영업세 인하, 노동권의 축소 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는 주장한다. “브로커와 펀드매니저에게는 세계와 세계경제, 그리고 그 결과로 생겨난 책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시장’이 아닌, 민주적으로 선택된 정부와 국회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 이런 그에게 “재무부 장관은 발권은행의 독립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화폐정책에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은 유치한 것일 뿐이다. 이른바 ‘관치금융’에 시달리다 ‘중앙은행 독립성 신화’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발언이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학자 노먼 버바움의 평가대로 “다국적기업의 국제적 엘리트는 생산수단뿐 아니라 정치적 의지 형성을 위한 수단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라퐁텐은 주도면밀한 공격을 받고 현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한 날, 증권거래소에서 유로화는 단 7분 동안 달러 대비 2센트가 올랐고, 주가지수는 개장 뒤 15분 동안 6%가 상승했다. 독일 보험기업체사용자연합의 회장인 한스 슈라이버는 “오늘은 내가 이 자리에 있었던 이후로 가장 좋은 날이다”라고 환호했다. 재림한 신인 듯 떠받들어지는 ‘시장’이라는 게 얼마나 강력한 부자들의 이데올로기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녹색당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98년 5월 코소보 전쟁에 관련한 빌레펠트 특별전당대회에서 이미 평화주의와 작별을 고했다”(녹색당 소속인 요쉬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은 나토의 세르비아공습을 지지했다!)고 비판하는 라퐁텐의 문제의식이 ‘역사의 각주’로 전락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변화를 통한 유지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그 곳, 바로 그 곳이 새로운 정치적 중심”이라는 빌리 브란트의 경구와 함께, “사민당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심장은 아직 증권거래소에서 매매되지 않는다. 그러나 심장은 하나의 확실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심장의 박동소리는 왼쪽에서 들린다”라는 라퐁텐의 잠언은 기억해둘 만하다. 그렇다, 확실히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

이제훈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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