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8월 2000-08-01   1072

소음 폭력의 사회

서귀포에서 유람선을 탔다. 선실에 커다란 노래방 기계가 설치되어 있다. 갑판으로 올라가니 거기에도 커다란 확성기가 설치되어 있다. 유람선에 웬 노래방 장치? 한 섬을 돌아보고 다른 섬으로 향할 때, 그 이동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결국 고막을 찢을 듯이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짜증스럽게 견뎌야만 했다.

속초에 가려고 미시령을 넘었다. 고단한 몸을 잠시 쉬게 하려고 미시령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차 문을 여는 순간, ‘뽕짝 댄스 메들리’가 온몸을 난타하며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 산꼭대기에서 그처럼 빠르고 시끄러운 노래를 쉴새없이 틀어대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렇게 시끄럽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거기에 휴게소가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라는 듯이.

북한산을 오르는 길에 도선사 구경을 했다. 시멘트로 포장된 산길을 커다란 절 버스가 시끄럽게 매연을 내뿜으며 올라간다. 시멘트 건물 일색인 절 안은 확성기를 통해 울려 나오는 염불소리로 시끄럽기 짝이 없다. 마주보고 있는 두 건물에서 서로 다른 경을 읽어대고 있다. 그 옆의 작은 건물의 이름은 우습게도 ‘조용한 집’이라는 뜻의 ‘묵적당’이다.

나무들을 보며 쉬고자 홍릉수목원에 갔다. 길가 쪽은 차량의 소음으로 몹시 시끄럽다. 나무과학관으로 들어갔다. 어린이들이 뛰어다니고 소리를 질러댄다. 혼잡하고 시끄러워 정신이 없다. 부모들이 꾸중하고 달래서 가르쳐야 옳겠건만, 그렇게 하는 부모는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아이를 부르기 위해 고함을 지르기 일쑤다.

영풍문고 음반매장에 갔다. 천정에 설치한 확성기를 통해 울려퍼지는 댄스가요로 매장이 떠나갈 듯하다. 조용한 클래식 연주곡을 사려고 이 매장을 찾았건만, 쉴새없이 고막을 때리는 노랫소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떻게 이렇게 시끄럽게 할 수 있냐고 매장측에 항의했더니, 오히려 별 미친놈 다 본다는 눈초리다.

마침내 차량의 소통이 끊긴 새벽녘. 어둠과 고요 속에 가라앉아 잠을 청하지만, 갑작스런 폭음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만다. 오토바이 폭주족, 아니 폭력족이다. 새벽마다 내 고막은 이렇게 한방씩 맞고 있다.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번번이 얼굴 없는 폭력에 고스란히 당해야 하다니, 잡아서 단단히 혼을 내주고 싶다.

한국 사회는 아주 시끄러운 사회이다. 거리의 간판들은 우리의 눈을 시끄럽게 하고, 온갖 소음들은 우리의 귀를 얼얼하게 한다. 물론 한국 사회만이 유별나게 시끄러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현대 문명이란 모름지기 소음의 문명이기 때문이다. 신경에 거슬리는 갖가지 인공의 기계음은 현대 문명의 본질적인 한 속성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음에 예민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즐거운 소리도 다른 사람에게는 지독한 소음이 될 수 있다. 보기 싫으면 눈을 감을 수 있다지만, 듣기 싫다고 귀를 막을 수는 없다. 소음이란 단순히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소음 폭력’이다. 그것은 신경을 때려서 사람을 속으로 병들게 한다.

한국이 유별나게 시끄러운 사회가 아닐지는 몰라도, 소음에 대해 유별나게 무감각한 사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버스나 택시는 으레 라디오를 틀어 두고, 가게들은 으레 확성기로 호객을 해대고, 지하철은 매일 수많은 사람들의 고막을 찢어 놓는다. 한국은 ‘소음 폭력’이 만연한 사회이다.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첫 장면을 보고는 공감의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방 기계를 쿵짝쿵짝 울려가며 물놀이하는 모습이라니. ‘속희가무’의 전통도 좋지만, 때와 곳을 가려가며 노래하고 춤추자.

홍성태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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